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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ㅣ 묘보설림 2
루네이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평점 :

루네이,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작년에 류전윈과 옌롄커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중국 문학의 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었다. 우리에게 광주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문화대혁명이 있었다. 처음 만난 작가를 한 작품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쉽지 않겠지만, 그전 세대의 문학 작가들과 다른 결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대기아 시대에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하고 삼촌에게 의탁해서 겨우 살아남는데 성공한 청년 천쉬성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바로 페놀을 생산하는 전진화학공장이었다. 그곳에서 사부를 만난 쉬성은 사부에게 기술을 전수받고(사회주의 중국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봉건제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외동딸 리위성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다시 직공들에게는 생명줄 같았던 보조금을 사부의 도움으로 받는데 쉬성은 성공한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천국이라던 중국에서도 인민들은 그놈의 보조금 없이는 살 수 없었단 말이다.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이 몰락하면서 덩샤오핑이 주도하던 개혁개방이 시작된다.
대기아 시대와 문화대혁명 기간에 성실한 쉬성은 사부와 사형 건성을 잃는다. 쉬성에게 먹을 것과 일자리 그리고 거처를 제공해 주던 페놀 공장은 한편으로는 언제라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대가로 목숨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페놀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모두 알고 있었다. 전진화학공장은 마치 사회주의 중국의 축소판 같았다. 타인을 짓밟고 승진하기 위해, 아니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밀고와 모함, 감시가 수시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리테뉴 주임이 왕싱메이와의 관계 때문에 그리고 쉬성의 사형 멍건성이 차례로 노동자에게는 치명적인 노동개조형에 처해졌다. 폭력을 피해 도망치던 왕싱메이는 어이 없이 죽고 말았고.
어렵사리 결혼에 골인한 위성은 아이를 갖지 못한다. 그리하여 시골 사촌형의 막내딸 푸성을 쉬성과 리위성 부부는 입양한다. 장애가 있었지만 부부의 보살핌으로 극복해낸 푸성은 들판의 잡초처럼 그렇게 쑥쑥 자란다. 페놀 공장에서 한 때 한직으로 밀려 나기도 하지만, 결국 성실함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인정받은 쉬성은 다른 사람들의 보조금 신청을 어쩔 수 없이 도맡아서 해결해 주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십수년의 노동개조형을 마치고 공장으로 복귀한 건성은 장애와 전과 때문에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던 공장 사람들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였다. 창고지기와 노점으로 새출발을 해보려고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 버렸다. 행복할 수 없었던 과거사의 피해자라고 해야 할까.
간경화로 시름시름 앓던 위성은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 버리자, 기묘하게도 그 때부터 쉬성의 운이 트이기 시작한다. 교활한 쑤샤오둥이 민영화된 전진화학공장을 거저 먹다시피 인수해서, 수십년간 일해온 노동자들을 직위해제시키고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기 시작한다.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 폐해가 그대로 사회주의 중국에 도입되면서, 그나마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던 장치들이 해제되고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쟁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연명하던 푸성의 친부 투건도 그 바람을 타고 단박에 부자가 되지 않았던가. 한편, 페놀 공장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천쉬성과 동료기사 덩쓰셴에게도 금전의 신이 마침내 부드러운 손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소설의 말미에 달린 옮긴이의 말을 읽어 보니, 루네이 작가의 이력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직군을 전전하면서 쌓은 세상 이야기에 대한 채집은 과연 소설 <자비>의 밑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 때, 페놀 공장에서 일했다는 부친의 체험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소설을 쓰기 위해 만난 진짜 직공들의 이야기는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고 했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래, 경쟁이 없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중국 인민들에게 덩샤오핑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기회이면서도 동시에 위기였다. 천쉬성이나 덩쓰셴 같이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던 기사 혹은 직공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겠지만, 별다른 기술이 없는 보통의 농민공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대상이 국가에서 자본계급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전혀 없지 않았던가.
평생 건달처럼 살았지만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건성은 그나마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창고지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노점도 해보고 계도 들어 보지만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는 자본주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건성은 장애와 전과라는 이중 장애물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일상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으면서 평생 한길만 파온 쉬성이 말년에 행복을 찾는 장면은 일면 진부해 보이기도 하면서 역시 삶의 진리는 간단하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50년 전에 헤어진 동생과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야기 숲을 거니는 고양이, 그러니까 글항아리 출판사의 묘보설림 시리즈가 야심차게 시작했던 다른 출판사들의 중국문학 시리즈들처럼 단명하지 않고 계획 대로 꾸준하게 순항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시리즈에 소개된 옌롄커의 <일식>과 왕웨이롄의 <책 물고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