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인정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존 밴빌의 <바다>는 나에게 읽기 만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수년을 질질 끌던 책을 아마 작년에 다 읽었었지. 그러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던가. 다른 번역자였다면 또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번역자였다. 그전 책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결정적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돼서 읽게 되었는데, 책은 읽었는데 독서모임에는 미처 나가지 못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201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아마존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패스했다.

 

소설 <바다>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아내 애나를 잃은 홀아비 미술 역사학자 맥스 모든이 5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며 다시 찾은 시더스에서의 며칠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 세 가지 시점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시더스의 현재,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 애나의 다가오는 죽음을 알게 된 1년 전 그리고 꼬마 맥스에게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했던 50년 전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소설의 출발점은 지금이 아닌 50년 전의 시더스다.

 

지난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아내를 잃은 홀아비 맥스는 늙은 사냥개 같은 모양새로 시더스를 다시 찾는다. 외동딸 클레어에 따르면 맥스는 과거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가 겪어야 하는 미묘한 게임을 해야 한다. 홀로 남은 자의 공허와 메아리로부터 그는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어쨌건 간에 밸리레스에서 상처한 남자 맥스 모든은 모두에게 동정을 받았다. 맥스 모든은 “세상을 조금씩 재서 섭취”(180쪽)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한편 아버지 짐이 떠난 뒤, 모든(Morden)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궁핍에 시달렸다.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맥스는 부유한 집안의 애나 와이스와 만나 결혼하고 마침내 유년시절 이래 꿈꾸어 왔던 계급적 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딸 클레어 역시 딜레당트(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이 아닌 취미 삼아 하는 사람, 164쪽)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들에게 매료된 소년 맥스에게 부족한 건 자산 뿐이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게 들린다. 빈곤 가운데 돌아가신 맥스의 어머니가 과연 자신의 아들이 벨 에포크 시절의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논문을 쓰는 지식인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잣집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맥스의 어머니는 자식의 아들 이름이 심지어 맥스가 아니었냐며 따진다. 그렇다면 그의 원래 이름은 뭐였을까? 맥스 모든 박사는 결혼이라는 전통적 방법을 통한 계급적 상승을 이루면서 아예 자신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버렸단 말인가.

 

이상이 현재라면, 과거의 회상은 좀 더 감정적으로 미묘하면서 복잡하다. 시더스에서 소년 맥스는 자신에게는 신과 같았던 부유한 그레이스 가족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 칼로, 어머니 코니 그리고 쌍둥이 남매 클로이와 벙어리 마일스. 그리고 가사도우미 로즈로 구성된 그레이스 가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현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만신전이 떠올랐다. 맥스의 신에 대한 비유 그리고 집착 때문이라고 해두자. 소년에게 코니 그레이스 아줌마는 그야말로 아프로디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성숙한 여인 코니 그레이스에게서 소년의 감정은 코니의 딸 클로이에게로 점점 이동한다. 그 과정을 “심미적인 결정화”라는 표현으로 인식과 인정의 장엄한 순간이었노라고 설명했던가. 스타일리스트로서 작가의 실력이 극대화된 장면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이 어떤 계기로 신들 같았던 그레이스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하고, 신들은 바닷가를 그렇게 떠난다.

 

존 밴빌은 어려서부터 그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서사의 전개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선의 변화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소설 <바다>에서 독자는 주인공 맥스 모든 박사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솔직히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존 밴빌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라고 표현한 것처럼, 스타일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서사는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자는 과연 <바다>에서 어떤 줄거리를 뽑아낼 수 있을까. 결말 부분에 가서 맥스 모든 박사가 술에 취해 익사할 뻔한 장면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에서 조지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겹쳐졌다. 일종의 자기애,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들이라고나 할까.

 

기억 속에 사는 남자 맥스 모든은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158쪽)을 십대 시절에 사랑한다고 믿었던 클로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내 애나와의 불화는 필연적인 게 아니었을까.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이라니. 남편을 미워했다고 고백하는 애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애나는 남편이 아닌 딸 클레어에게 카메라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병원에서 타인의 고통을 그 카메라(컬러 사진)로 기록했다.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녀의 모습에서 죽음을 대하는 하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애나와 달리 클레어의 아버지 맥스는 황금알을 낳지 못하는 통통한 거위였기 때문에 모녀 관계에서 배제된 걸까. 애나가 입원한 병실에 대한 묘사에서는 얼마 전에 읽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환자에 대한 서술 부분이 연상되기도 했다.

 

겸업작가 존 밴빌의 열네번째 장편 <바다>는 두 번 읽어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2005년 경쟁작으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비롯해서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 알리 스미스의 <우연한 여행자>, 시배스천 배리와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나를 보내지 마>와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그만큼 부커상 심사위원들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사보다 존 밴빌의 스타일을 높게 평가했던 게 아닐까. 그나저나 그 수많은 존 밴빌의 작품들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속히 신간 <오스몬드 부인>을 비롯한 작품들이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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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12-18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이 책 읽다 덮어서 곱게 모셔뒀어요....
내년에 아마 만날지도 몰라요...

레삭매냐 2017-12-18 13:1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서사가 재밌거나 그런 책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부커상의 광휘와 대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