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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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언제 다시 읽어도 좋은 법이다. 언제고 나는 <싱글맨>이 재출간될 줄 알았다.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로운 옷으로 입고 나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원서로도 사서 대조해 보고, 영화도 구해서 본 기억이 난다. 탑게이 패션 디자이너 출신 감독 톰 포드의 연출작이었다. 대단히 탐미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콜린 퍼스 그리고 그의 제자로 등장한 니콜라스 홀트에 대한 짧은 기억 정도.

 

어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제는 예전에 읽었던 기억에 영화를 보고 느낀 점들, 그리고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느낀 점들이 채색되는 게 아닌가. 소설의 주인공 조지는 올해 58세로 최근에 애인 짐을 교통사고로 잃은 영문학 교수님이다. 아마 주변인들은 퀴어라는 그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역시나 보헤미안 유토피아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2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자그마치 16년이나 파트너로 같이 살아온 짐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조지의 하루가 소설 <싱글맨>이 그리는 내용이다.

 

미국의 개척자들처럼 전쟁이 끝난 뒤, 자손을 번창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의 나라 남가주, 캘리포니아로 몰려온 모양이다. 조지와 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출신의 조지는 새로운 개척자들의 뒤를 따라 바닷가 근처에 근사한 집을 마련했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짐과는 달리 아이들로 벅적대는 이웃과 친근하게 지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짐이 죽은 다음, 그가 기르던 구관조를 비롯한 동물들도 생전에 약속대로 처분했다. 전쟁이 끝나고 휘발유 배급이 끝나자, 좋은 시절이 왔다. 그리고 미국의 번영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미끈하게 닦인 고속도로를 달려 출근하는 조지의 모습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 시절의 자신감과 번영을 엿보게 된다.

 

아, 정치적인 이야기 하나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1962년 가을부터 비롯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 미국을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거대한 악의 제국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은 미본토에 사는 이들에게 악몽이었다. 당장에라도 지구가 멸망한 것 같은 위기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파티를 벌이고, 사랑을 나누며 음주를 즐겼다.

 

소설 <싱글맨>에서 저자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마치 카메라 앵글을 조지의 일상에 들이댄 것처럼 그렇게 정밀하게 추적한다. 카메라가 느린 속도로 주인공의 이미지를 잡아낸다면, 작가는 조지의 감정까지도 카메라에 담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스로를 추잡한 늙은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중년의 교수는 테니스장에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매혹당하기도 한다. 강의실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고, 죽은 애인과 바람이 났던 도리스의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살아있음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또 처음에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지만 같은 영국 출신 친구 샬럿을 방문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비중있게 다룬 제자 케니 포터와의 만남, 영화에서는 케니의 역할을 아마 니콜라스 홀트가 맡았었지. 그의 젊음을 부러워하면서, 살짝 유혹에 가까워 보이는 전개는 소설의 후반을 장식하는 투어 드 포스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봐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는 설정부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의 나른한 분위기, 유혹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계를 누비는 주인공의 절제된 감정선의 표현은 확실히 대가다운 면모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보다 주인공 조지의 감정에 치중했다면, 아무래도 톰 포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는 그런 감정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의 재현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탐미적인 영상은 또 어떤가. 영화가 소설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라는 점을 보았을 때 결말 부분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싱글맨’ 조지에게 캘리포니아가 천국일 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상실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었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비록 예전만한 몸매는 아니지만 강단 교수라는 일자리와 경쟁을 통해 동년배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의 발로는 역시나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케니에 대한 감정은 고대 플라톤 시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그 접점을 찾아보려고 했던가.

 

소설 <싱글맨>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펼쳐지는 사랑과 죽음, 질투 그리고 유혹에 이르는 개인의 다양한 감정들을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수작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책은 두 번 읽어도 역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나저나 새로 나온 책의 표지는 정말 화끈하구나.

참고로 역자는 구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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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02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비 세계문학에서 나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작품 두 권 읽고 이건 아직 아껴두고 있었는데 아껴두길 잘했군요. 창비에서 개정판 나온 것으로 읽어야겠어요. ㅎㅎ

레삭매냐 2017-08-02 10:02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
전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이여 안녕
이 예전에 독서 모임 책이어서 바로 두 권
모두 주문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크리스 아이셔우드 판권을 창비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네요 :> 다른 책들도
신속하게 출간해 주시길.

cyrus 2017-08-02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속 인물이 소설 주인공 조지를 의미하겠죠? 벌거벗은 여성을 거인으로 묘사하고, 그걸 지켜보는 남성이 있는 구도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삭매냐 2017-08-02 11:3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영화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조지 교수님
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온 게 아닌가 싶네요.

AgalmA 2017-08-03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싱글맨> 소설 너무 빨리 품절된 거 같아 저도 기다리던 참였는데^^ <에브리맨> 호평일 때도 늑장부리다 뒤늦게 보고 감탄했는데 이 책도 그럴 거 같아요ㅎ
<싱글맨> 영화 보고 콜린 퍼스 다시 봤어요^^

레삭매냐 2017-08-03 14:18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 구할 수 있을 적에는 거들떠도 안보고
있다가 절판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구했지요. 낙서가 여기저기 있는 중고책이었지만
나름 정겨운 느낌이어서 그대로 소장했습니다.

영화에서 콜린 퍼스, 말씀대로 정말 대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