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이언 매큐언 지음, 이민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뒤죽박죽 이언 매큐언 읽기는 계속된다. 일전에 시작한 <이런 사랑>도 미처 다 읽지 못했는데 <토요일>을 집어 들었다. 뭐 다른 책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주말 독서모임 때문에 마음에 다급해지지 않았나 싶다. 이언 매큐언 최고의 작품이라는 <속죄>는 국내에 나온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맨 끝에 읽을 계획이다.

 

소설 <토요일>의 주인공 헨리 퍼론은 올해 48세의 신경외과 전문의다. 2003215일 토요일 새벽, 사랑하는 아내 로설린드를 곁에 두고 잠에서 깬 헨리는 상념에 빠진다. 이언 매큐언은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유능한 외과의의 지나간 훌륭한 삶을 반추한다. 20대 중반에 가정을 꾸리고 지금은 파리에서 살며 시인을 데뷔를 눈앞에 둔 영민한 딸 데이지와 문학 토론을 즐기는 신세대 아빠. 6개월 만에 집에 도착할 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윈의 자서전을 읽는 아버지의 모습에 코끝이 다 찡해질 정도다. 다른 중년 남자들은 자신의 딸아이 또래의 애인을 둔 일탈에 젖어 있지만, 청교도적 생활에 집착하는 헨리에겐 언감생심이다. 건강유지를 위해 하프마라톤과 동료들과 스쿼시로 체력단련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역시 자신의 분야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 중인 매력적인 아내 로설린드에 대해서는 부언할 게 없을 것 같다. 새벽 하늘을 바라보던 헨리의 시야에 불붙은 비행기가 들어온다. 안온한 일상에 무언가 파장이 다가온다는 전조였을까. 어쨌거나 블루스 뮤지션으로 촉망 받는 아들 테오 정도가 청정지역처럼 보이는 퍼론 가정의 이단아라고나 할까. 정규 교육을 거부한 아들의 음악세계를 이해할 정도로 개방적인 헨리의 정신세계를 작가는 세심하고 정밀하게 묘사한다.

 

아내 로설린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도 역시 병원에서였다. 19세 법대생이었던 로설린드는 갑작스런 시력기능 상실로 병원에 찾는다. 뇌에 종양이 있다는 선고를 받은 로설린드는 신참내기 수련의 시절 헨리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의사가 가진 권한으로 그녀의 개인정보에 접근한 헨리는 로설린드와 웨일리 선생이 집도한 로설린드의 수술을 보면서 평생의 사랑을 찾게 된다. 하나는 진짜 사랑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생의 직업에 대한 사랑을 말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7시간씩 사람을 생명을 살리는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능력자이자 워커홀릭 헨리에 대한 서술은 마치 스포츠 현장중계를 보는 것처럼 정밀하고 생생하다.

 

14년 전에는 중요한 인물이었던 한스 블릭스의 이름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한다. 검색해 보니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으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사찰에 나섰던 인물이라고 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보다 하루 전인 214일 한스 블릭스는 이라크 무기 사찰 후,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공식 보고를 했지만 미국 부시 행정부는 막무가내로 이라크 전쟁을 예고했다. 다음 날인, 2003215, 전세계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반전시위가 벌어진다. 기네스북에 인류 역사상 최대 시위로 기록된 반전시위였다. 런던에서만 50만 명 정도의 시위대가 전쟁반대를 외쳤지만, 한달 남짓 뒤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서방세계의 안온한 일상을 위협하고 있는 중이다. 문득 어떤 점에서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은 현대판 묵시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 퍼론의 평범한 일상이 언제라도 테러세력의 공격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리고 테러세력이 의도하는 사람들은 분노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조작된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이 지금까지도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즘의 발호를 가져오게 될 줄 이때만 해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은 2006년 뉴욕타임즈에 의해 폭로된 미국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에서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쓴 글들을 섭렵하기도 했다. <이슬람 전사의 탄생>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는데 해당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책이다.

 

이라크 반전시위가 지구별을 휩쓰는 동안 헨리 퍼론은 자신의 미국인 동료, 마취의 제이 스트라우스와 스쿼시 게임을 하고자 길을 나섰다가 결정적 사건에 처하게 된다. 경찰의 묵인 하에 봉쇄된 유니버시티 스트리트를 가다가 아주 우연한 접촉사고를 당한다. 이십대 중반의 건달패 박스터 일당과 시비가 붙고, 가슴에 찰과상을 입을 정도였는데 헌팅턴병 혹은 무도병으로 알려진 심각한 수준의 뇌질환을 겪고 있는 박스터의 약점을 공격해서 위기탈출에 성공하는 헨리 퍼론. 그는 일정을 취소하지 않고 제이 스트라우스와 세기의 스쿼시 대결을 벌인다. 그 후에는 모든 가족이 모이는 저녁 식사를 위해 생선 스튜를 만들 준비를 하고, 아들 테오의 블루스 연주도 들으러 가고 치매를 앓으며 세상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어머니 릴리 퍼론 여사를 방문하기도 한다. 박스터의 공격적 방문을 받기 전까지 헨리 퍼론의 일상은 평온 그 자체였다. 곧 뜻하지 않은 불청객의 방문으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되지만 말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돌팔이 두뇌접골사로 보이는 헨리 퍼론을 주인공 삼아 이언 매큐언은 누구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독자에게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소설에서 잘난 딸 데이지에게 꼰대로 매도당하는 유물론자이자 유능한 실리주의자 신경외과 전문의 헨리 퍼론은 사담 후세인의 강제축출이 서방세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주장을 피력하지만, ! 14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사담 후세인 이후 진공 상태의 이라크와 시리아 내전을 통해 발흥한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서방세계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 <토요일>에서처럼 우리의 평온한 일상은 이제 그 어느 누구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이언 매큐언의 다른 작품들처럼 100페이지 정도 드러냈으면 좀 더 컴팩트한 스타일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일급 추리소설에 버금갈 만한 긴장감 조성도 역시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세계의 정교한 뇌수술 과정을 그리기 위해 자그마치 2년 동안 직접 뇌수술 현장에 참석했고, 전문가의 조언도 아낌 없이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뇌수술 장면들이 그렇게 리얼했었나.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헨리 퍼론과 박스터 일당이 붙은 유니버시티 스트리트 부근의 제레미 벤담 선술집도 진짜로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맡은 전문의답게, 저급한 수준의 복수 대신 활인(活人)에 방점을 찍은 결말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언 매큐언은 서구세계에 점증하는 테러의 위협에 자신이 생각하는 관용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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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6-24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끝까지 조마조마 했어요....
구글 지도로 팩트체크고 하셨군요! 소설 속 세계가 더 생생해지네요. ...지지배뱃

레삭매냐 2017-06-24 23:07   좋아요 0 | URL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면서
긴장감이 촉발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재밌어서 역시나
이언 매큐언이나 싶었습니다.

제레미 벤담이라는 선술집이 실존하는
장소라 더더욱 놀랐네요.

독서괭 2017-06-28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큐언은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속죄까지 다 읽고 나시면 입문으로 어떤 작품이 좋을지 추천해 주시면 좋겠네요^^

레삭매냐 2017-06-28 16:49   좋아요 1 | URL
일단 지금 읽고 있는 <이런 사랑> 그리고
<시멘트 가든>, <속죄> 이렇게 남았네요.

절판된 소설집은 구할 수가 없으니 일단
유보해 두고요.

지금까지 읽은 기준으로 보면 <칠드런 액트>
로 시작해 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