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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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텅 빈 상태로

 

지난 주말 독서 모임을 위해 출간된지 자그마치 30년이나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모임에서 우리 동지 마욤님은 다양한 버전의 <상실의 시대>(기존의 제목)를 보여 주셨었다. 그리고 번역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까지. 내가 읽은 민음사 판에서는 특공대라고 번역된 부분이, 원서에서는 아마 돌격대라고 되어 있다는 말도. 예전 판형에서는 “와타나베 형”이라고 번역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국내에 하루키가 소개된 것이 90년대 초반, 소위 운동권 세대가 쇠퇴되고 X세대라 불리던(이제 그들도 중년이 되었다)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과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루키가 만들어낸 와타나베 도루라는 스타일 넘치는 인간형에 대한 의견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된 1968년, 69년 일본은 그후로도 영영 없을 전설적 전공투 시절이 아니었던가. 트란 안 훙이 연출을 맡은 영화 <상실의 시대>에서 전공투 학생들이 강의실에 난입해서 교수님에게 토론을 해야 하니 시간을 내달라는 반협박조 요구를 하는 장면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트란 안 훙의 연출장면을 제대로 감상할 틈도 없었는데 먼저 영화를 보신 분들의 반응은 “쓰레기”였다. 그 정도였던가? 나야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 그의 책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소설에서는 간략하게 등장한 사회적 이뷰 부분에 대해 분석하는 놀라운 실력의 헤르메스님의 분석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문제는 하루키라는 인간이 그런 사회적 이슈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

 

책을 완독하기 전에 유투브에 뜬 미국 독자들의 리뷰를 들어 보았는데, 아마 젊은 세대라 그런지 그런 깊숙한 분석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소설의 엔딩에 아주 실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루키의 소설들이 세계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점 중의 하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형적인 일본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와타나베 도루만 하더라도,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고 내내 강조하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가 소설에서 어울리는 나가사와 선배와는 또다른 형태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전자가 오만함을 무기로 거느리고 있다면, 와타나베 씨는 친절함과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배려를 장기로 삼고 있다. 그러니 어떤 여자들이 그를 거절하겠는가. 시크하면서도 상대방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물론 그런 와타나베의 인성에는 17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 기즈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독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사귀게 되는 나오코 역시 기즈키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기묘한 관계가 지니고 있는 파국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한 가정 배정을 알아야 상대방에게 접속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의 언니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기즈키 역시 어떤 징후도 없이 와타나베와 기분 좋게 당구를 치고 나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죽은 이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잔존 기억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문득 노무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친구가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없기에 잘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서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어떤 특정한 답은 없었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삶의 대극에 죽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문장도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현실적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토론해 보기도 했다. 중론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였다. 기존 연공질서를 우선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와타나베 같은 인물은 이단아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전공투 세대라 불리던 시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치투쟁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와타나베는 평범한 캐릭터일 수가 없다. 독일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 미도리가 수업을 땡땡이치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엄격하게 신주쿠에 있는 레코드점 아르바이트 엄수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그랬던가? 수업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빠지고 낮술에 절어 살지 않았던가. 강의실보다 바깥의 잔디밭을 더 동경하면서 말이다.

 

책읽기에 전념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미도리네 고바야시 서점에 가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이미 읽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밤을 세워 가며 완독하는 장면, 아미 사에서 요양 중인 나오코를 찾아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는 장면이란. 요즘 대학생들 중에서 소설 속의 와타나베처럼 그렇게 책을 읽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자신이 자고 나란 일본 문학보다 해외 문학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도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미도리 아버지를 찾아가 간병하면서 그리스의 희곡작가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이 정도되는 스타일을 가졌기에 그렇게 많은 하루니 팬들이 그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열광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에 읽는 하루키 책은 조금 더 냉정하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난 하루키의 팬은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어떤 문장들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 궁금해서 제이 루빈 씨가 번역한 영문판과 대조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의 압승이다. 도저히 영어 번역에서는 원서의 참맛을 살리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번역 논쟁에서처럼 말이다. 두 문장의 영어 번역을 소개해 본다.

 

120쪽 : 개수대 위의 창으로 파고드는 밝은 햇빛이 그녀의 몸 테두리에 뽀얀 선을 덧그려 넣었다.

The light pouring in from the kitchen window gave her figure a kind of vague outline.

 

140쪽 : 나는 초가을 오후 한순간의 마력이 벌써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And then I realized that the brief spell of the early autumn afternoon had vanished.

 

영어 문장들이 훨씬 더 밋밋하지 않은가. 의미에는 충실할지 모르겠지만, 뉘앙스에서는 정말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만 찰스나 존 혹은 티파니로 바꾼다면 전 세계 어디에 가져다 놔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일본 작품으로서는 부족할 수 있어도, 세계인이 함께 읽기에는 그만이라는 말일까.

 

소설의 어디선가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는 기억도 완전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는데, 결말로 갈수록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비틀즈의 동명의 음악과 빌 에번스의 <Waltz for Debby>가 듣고 싶어졌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왜 처음에 소개되었을 때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였는지 제목 한 번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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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9 1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로 제목이 선정된 것이 ‘순실의 시대’로 패러디하기 위해 만든 큰 그림이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5-29 14:22   좋아요 0 | URL
최고네요 ~
역시나 순실의 시대, 그나마 짧게 끝나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AgalmA 2017-05-29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도 학생운동 물결이 지나고 난 뒤<상실의 시대> 같은 후일담 소설이 많이 등장했지요. 제 기억엔 <상실의 시대>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 있었나 싶어요. 한국의 후일담 소설은 뭐랄까. 제겐 자폭형 글이라 생각되더군요. 이해받기 어려운 나만의 고통... 그런 느낌으로 중무장되어 있어 시대적 흐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겐 ‘과잉‘으로 읽히기 딱이죠. 그리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자칫 계몽주의, 애국팔이가 될 여지도 있고요.
김연수 작가가 좀더 가볍게 글을 썼다면 하루키랑 가장 비슷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이 댓글은 지극히 제 주관적 견해라 동의를 구하는 1도 없습니다ㅎ

레삭매냐 2017-05-29 15:38   좋아요 1 | URL
저희 독서모임에서 AgalmA님의 의견과
비슷한 의견이 개진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퇴조와 더불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루키가 도착했고, 새로운
세대에게 열렬하게 환영 받았다고요.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나만의 고통...
어쩌면 그렇게 꼭 짚어 주시는지.

아무래도 아류작은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 않나 싶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