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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 작가에 빠지게 되면, 만사 제쳐 두고 그 작가의 책들을 찾아서 읽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서 컬렉션으로 삼아 읽는 거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언 매큐언 선생을 좇는 나의 독서 여정은 <칠드런 액트>로 시작해서, <이노센트>를 거쳐 <체실 비치에서>에 도달했다. 아직도 읽을 수 있는 시중에 나와 있는 매큐언 선생의 책들이 많다는 점이 아주 만족스럽다. 다음에 대기하고 있는 책들은 <암스테르담>과 <토요일>이다. 그의 최고작이라는 <속죄>는 잠시 미루어놨다.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제 맛이니까 말이다.
구글맵으로 도대체 체실 비치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아 봤다. 영불해협 그러니까 프랑스의 셰르부르 항구 맞은편에 있는 바닷가였다. 책에도 나온 것처럼 동쪽에는 포틀랜드 섬이 있었다. 매큐언 선생의 책이 아니었다면 평생 관심이 없었을 그런 지명이, 이제 막 결혼한 커플인 플로렌스 폰팅과 에드워드 메이휴의 이야기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칠턴 힐스 출신의 청년 에드워드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대학 시절 그가 관심을 보인 주제가 천년왕국운동이었다고 했던가. 어머니 마조리가 뇌 손상을 당한, 그저 그런 집안 출신의 이 청년은 폰팅 전자 사장인 제프리의 딸인 플로렌스 폰팅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골인했다. 원래 청년의 꿈은 200쪽 남짓한 역사서적 시리즈를 저술하는 것이었지만, 폰팅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가업을 물려 되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바이얼린 연주자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플로렌스의 남편이자 바람직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 이제 남은 평생 동안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아, 에드워드가 플로렌스에게 청혼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던가. 이 청년은 참을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청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신성한 결혼을 폄훼하는 게 아니냐고? 독자제현은 좀 더 참고 매큐언 선생이 전개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볼 지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전설을 연상시킨다. 거친 욕망에 불타는 청년은 무언가 좀 더 진도를 나가려고 애쓰고, 성에 무지한 처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행복한 나날을 살 것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한가득 가지고 있다. 시절은 1960년대 초반 영국, 68세대로 대변되는 그전 세대와는 다른 획기적인 성개방 풍조의 도래를 앞두고 있던 시기다. 매큐언 선생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남녀관계에 대한 고찰에서 좀 더 나아가 세대 간의 갈등도 빠뜨리지 않고 저술한다. 어떻게 보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의 길항관계로 분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가령 예를 들어, 전전세대들은 스스로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당이 일으킨 세계대전에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노동당 수상이 들어서고,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명성이 전 세계에 산재해 있던 식민지들이 하나둘씩 독립하면서 추락해 가는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반면 버디 홀리와 척 베리로 대변되는 신세대 로큰롤이라는 유행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베이비부머들은 고리타분한 기존질서를 배격하면서 개혁과 혁신을 꿈꾼다.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개인관계 속으로 풀어 보면, 고전음악을 신봉하는 플로렌스와 로큰롤 음악을 사랑하는 에드워드, 그 둘 모두 서로의 음악 취향을 잘 알기 때문에 서로 조심하면서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런 서로 다름이야 말로 소설 <체실 비치에서>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 문제는 서로 다름을 해소하기 위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오해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처신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한 파국일 것이다.
두 남녀는 파반느 같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결혼생활을 꿈꾸었지만, 신혼 초야부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템포는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의 속도로 진행된다. 요즘 같으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첫날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플로렌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를 궁지에 몰아넣은 플로렌스는 당황한 나머지 한밤중에 바닷가로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뒤따라온 새신랑에게 그녀는 자신의 심각한 성적 불능을 고백하고, 에드워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던진다. 그렇게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의 관계는 급전직하한다.
에드워드는 그 나이 또래 대개의 청년들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가족들과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을 통해 신부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획득했다고 생각한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감상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진한다. 문제는 플로렌스가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플로렌스가 느끼는 원치 않는 그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환된다. 두 사람 모두 역사와 음악이라는 형태의 과거를 다루면서도 또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역사학도 에드워드가 과거에 대한 재해석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데 전력한다면, 반대로 플로렌스는 아마도 과거 에 작곡된 곡해석 대로 정격연주를 통한 혼란을 배격한 질서의 확립에 방점을 찍는다. 이렇게 서로 다름의 매력은 지남철처럼 상대를 끌어 들이면서도 동시에 밀어내는 이중성을 보인다.
왜 진작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서로 다름을, 성에 대한 인식 차이를 고백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두 사람의 태생과 성장배경 그리고 계급적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중편 정도 분량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매큐언 선생의 내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현재에서 출발해서, 과거에 어떻게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플래시백 그리고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 잡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는 신혼부부의 격정적 말싸움으로 치환되는 리얼리티의 재현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마지막 장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망적으로 사랑했노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경추를 짜르르하게 훑는 듯한 극한의 감정적 동조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래 연애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써야지 싶을 정도로.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에로틱한 점에서도 작년에 만난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에 버금갈 만한 수준이었노라고 덧붙이고 싶다.
[뱀다리] 기회가 된다면, 원서로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