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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평점 :
미심쩍었다. 역사상 최악의 선전선동의 대가라 불리는 나치 제3제국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소설이라니. 하도 가짜뉴스가 세상을 속이니, 그가 이십대에 발표했다는 소설 <미하엘>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괴벨스의 주군 히틀러에게 <나의 투쟁>이 있었다면, 괴벨스에게는 <미하엘>이 있었다.
이 소설을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괴벨스가 처음부터 국가사회주의(나치즘)에 경도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가 문헌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문학에 대한 조예도 남달랐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렇게 학문적으로 갈고 닦은 재능을 인류사에 저해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요란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두 물질의 융합반응처럼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그의 수하 괴벨스 박사는 제3제국과 독일민족을 전쟁이라는 파멸로 몰아넣은 주범이었다.
일기소설 <미하엘>의 모델은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괴벨스의 지기 리하르트 플리스게스다. 실제 전쟁에서 전투를 못해서 진 것이 아니라고 믿는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1차세계대전의 패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흔이었던 모양이다. 패전의 치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국건설이야말로 일생의 과제라는 선전이 소설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투쟁과 결단’이라는 “살벌한” 단어로 애정을 표현하다니, 그 시절을 정녕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나레이터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저 믿는 것이 중요하단다. 훗날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자신의 선전기술에 대한 예고편 혹은 왜곡된 신념의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정치나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헌학도 출신 대학생답게(소설에서는 법학과 예술 전공이었던가) 여행길에서 만난 러시아 출신 대학생 이반 비누로프스키와 러시아 출신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이하 도끼 선생)에 대해 화자가 토론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도끼 선생의 대표작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 백작의 예를 들어 다짜고짜 러시아인들은 모두 백치이며, 변덕스러운 성정을 가진 영혼들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서슴지 않는다. 도끼 선생의 작품을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한 싸구려 장식품”이라고 폄하하고 조롱한다. 동시에 아직 모습을 갖추지 않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잠재적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현명한 인재가 왜 히틀러의 파멸을 불러온 바르바로사 작전의 재고를 요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에겐 동방정복을 통한 레벤스라움의 조성이라는 허황된 이상이 현실을 무시한 군사작전보다 더 중요했던 것일까. 반유대주의,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는 건 남성이라는 남성우월주의에 이르기까지 편협한 사고의 전개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이 논리나 이성보다 그저 개인의 직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더 놀랍다.
이어지는 연인 헤르타 홀크와의 대화에서도 여성을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아이를 낳은 그릇 혹은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일기의 주인공 태도에서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논리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따르라는 주장에서는 훗날 제3제국에서 독일 민족을 파멸 근처에까지 몰아넣은 저돌적 맹신이 느껴지기도 했다. 노동, 희생 그리고 정신을 강조하면서 뮌헨에서 우연히 만난 지도자(아돌프 히틀러)야말로 독일 민족의 메시아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러시아 대학생 이반으로 대표되는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대결구도와 독일 패전의 주범이 자본가 계급과 유대인이라는 비논리의 전개에서는 치기어린 학자의 생각으로만 볼 수 없는 악의 본질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미하엘은 하층 계급의 노동이야말로 무엇보다 신성한 국가의 이상이라는 신념 아래 자발적으로 탄광으로 돌입해서 탄광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신뢰를 쌓아 나간다. 전문교육을 받은 대학생이 자신들과 같이 어울려 석탄 캐는 노동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미하엘의 동료들은 그를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노동자 조직에 침투시킨 프락치라고 의심하지만,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그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다. 아니 이 소설이 과연 나치 천년제국의 신념을 가진 희대의 선전상이 쓴 소설이 맞단 말인가? 역자 후기에서 왜 번역자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가슴으로 읽으라는 당부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괴벨스의 소설 <미하엘>을 다 읽고 나서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때 희곡과 시를 쓰며 아리따운 아가씨를 사랑하던 문학청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편견과 왜곡된 신념으로 무장한 관료가 되어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독일 시민들을 파멸로 몰고 가게 되었는지 말이다. 소설 <미하엘>은 그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