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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 -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변론기
이재화 지음 / 글과생각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한 때 통합진보당을 지지한 적이 있었다. 아마 지난 19대 총선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총선 직전에 벌어진 관악을 경선조작 사태와 이후 킨텍스에서 생중계된 중앙위 폭력사태를 보면서 이 정당에 대한 오만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소위 당권파라는 사람들은 폭력사태가 마치 없었던 사건인 것처럼 그렇게 넘어가 버렸다. 당시 아무도 해당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다(이정희 대표가 같은 해, 9월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이미 그 때는 늦었다). 그렇게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어 버린 정치집단을 보는 나의 시선은 냉소적이 되어 버렸다. 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통합진보당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이석기 의원이 참석해서 문제가 된 5.12 회합이 언론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이정희 대표의 일관되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주장을 들으면서 이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못하게 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기획된 해산 의도된 해산>은 통합진보당의 변론을 맡은 이재화 변호사에 의해 기술된 책이다. 정봉주의 전국구 팟캐스트를 들으며 익숙해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의 핵심은 있어서는 안될 사상 초유의 국가폭력이었다는 점이다. 18대 대선 선거 과정에 이정희 전 대표의 발언에 대한 정치보복성 재판이라는 지적에서부터, 보수 언론에 의한 온갖 마타도어가 난무하고 설상가상으로 합정동 RO모임 사실까지 공개되면서 해산심판은 법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다툼이 아니라 정치행위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헌법재판소는 경기의 심판이 아니라, 주전선수가 되어 버렸다. 이재화 변호사가 상세하게 들려준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 통합진보당 해산은 판결 이전에 (정치적으로) 결정된 사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산심판에 임한 헌재의 재판관들은 실체적 진실보다 이념을 중시했다는 것이 이재화 변호사의 주장이다. 재판 과정에서 다수의 전향자들과 간첩들의 근거 없는 추측과 추론을 참고하면서, 서로 어긋나는 주장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리는 일들이 빈번했다고 한다. 엄청난 분량(17만 5천쪽)에 달하는 정보들을 과연 재판관들이 숙지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실제로 나중에 판결이 내려진 뒤에 오류를 바로 잡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가. 사실 법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복잡한 법리를 다투는 과정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왜 그렇게 정당해산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서둘러서 진행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불과 한 달 뒤에 있을 대법원 판결에서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고, 지하혁명조직(RO)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헌재와 대법원의 서로 배치되는 판결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대법원 판결을 예측하고, 무리하게 서둘러서 판결을 진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당해산심판에 대한 국제기구인 베니스 위원회의 권고 따위는 가볍게 무시되었고, 통합진보당은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
헌재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석기 내란음모죄와 관련된 지하혁명조직으로 알려진 RO역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조직이라고 판단했지만, 헌재에서는 RO가 구체적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발표했다. 과연 우리나라가 고작 그런 엉터리 조직 하나에 휘둘릴 정도로 기초가 튼튼하지 않단 말인가. 구시대적 사고를 가진 두 명의 내란선동자(이석기와 김홍열)가 10만 명의 당원을 가진 조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강령이 공개된 공개 정당에 불순한 숨은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일부 전향인사들의 추정과 개인의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간접증거가 아니라 직접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재판을 진행한 점에 대해서도 저자 이재화 변호사는 증거재판주의에 위배되는 사항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당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반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당신 온라인 투표 부정행위에 대한 검증을 맡은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가 최근 고 성완종 씨의 녹취록을 JTBC에 무단으로 유출하면서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 전문가의 행위가 절취에 해당한다고까지 말했는데, 그가 여러 언론매체에서 그간 주장해왔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행위와 관악을에서의 경선조작 이슈, 중앙위 폭력사태 등은 진보의 도덕성에 타격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직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헌법재판소가 어떤 법리적 근거도 없이 박탈했다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위헌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소속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하는지 혹는 상실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헌법이나 법률 상의 명문화된 규정이 없다는 사실도 이재화 변호사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어쨌든 통합진보당의 해산결과 치러진 지난 4.29 재보선에서 입증되었듯, 기존의 통합진보당은 더 이상 정당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진중권 교수가 말했듯이, 그냥 놔두면 알아서 소멸될 정당을 굳이 해산심판이라는 무리수를 둔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 대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침묵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