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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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키 타령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난 그들만큼 하루키를 읽어 보지 않아서일까. 아마 그의 팬들처럼 하루키를 많이 읽다 보면 그들처럼 하루키 매니아가 되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책쟁이인지라 지난여름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엄청난 인세 경쟁 끝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름 흡인력이 있어, 250쪽까지 빛의 속도로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곧 급하게 읽어야할 다른 책들이 강력하게 등장했고 독서모임을 이틀 앞둔 오늘에서야 비로소 <다자키 쓰쿠루>를 다 읽었다.

 

그렇게 두 번에 나누어 읽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책을 읽은 기분이다. 무더운 여름에 좀 달뜬 기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을 대했다면, 만추의 계절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만난 하루키는 또 달랐다. 석 달 동안 책에 담긴 서사가 성숙한 느낌이랄까.

 

<다자키 쓰쿠루>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다자키 쓰쿠루(). 도쿄의 지하철역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이자, 건실한 36세의 중년 남자다. 고만고만한 연애와 이별을 경험하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는 16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어쩌면 우연이었지만 가장 소중했던 우리 시절과 강제적으로 격리됐음을 곱씹는다. 마치 현재 우경화로 치닫는 오늘날의 일본이 버블 경제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남자는 하나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독자는 당연히 도대체 1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현재 자신의 애인인 사라를 통해 과거 청산으로 내몰린다. 예의 과정을 통과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처럼 세상에 역류하지 않고 살아온 남자 쓰쿠루는 이번에도 애인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과거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주체는 벼랑 끝에 내몰려야 비로소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강신주 박사의 말이 언뜻 뇌리를 스쳐간다.

 

사실 석 달 전에 읽은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격리로부터 간신히 치유된 쓰쿠루가 어떤 청년과 관계를 시작하지만 그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던가. 그조차도 이제 단련된 무색채의 쓰쿠루에게는 별 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미 큰 상처를 겪었기에. 이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 해서 나고야 시절 죽마고우들이 자신을 외면하게 되었는가의 연유를 찾는 것이다.

 

고향 나고야에 들러 지역사회에서 나름 성공한 세일즈맨과 기업 강사를 일하는 친구들을 만난 쓰쿠루는 나머지 친구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시로()는 죽었고, 구로()는 핀란드 남자와 만나 일본을 떠났노라고. 죽은 이에게 들을 말이 없는 쓰쿠루는 산 자를 찾아 핀란드로 떠난다. 개인적으로 핀란드로 과거를 찾는 순례를 떠난 그의 여로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왜 하필이면 북구의 나라 핀란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서술한 여러 단서들로 추론해 보지만 쉽지 않다.

 

하루키의 전작 <1Q84>를 읽어보지 않아 상대적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전작이 사회문제에 좀 더 천착했다면 신간 <다자키 쓰쿠루>는 개인사의 영역에 비중을 맞춘 게 아닌가라는 평이다. 문학이 어느 사회의 거울로 작용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동안 세계에서 무언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동분서주하던 국가 일본이 이제는 내실을 다지고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신주쿠 역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아니 갈 곳이 없는 상태로 서 있는 다자키 쓰쿠루의 모습에서 오늘날 일본을 읽는다고 한다면 무리일까? 다자키 쓰쿠루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집과 유산으로 오늘날 자신을 이룬 것처럼 전후세대에 빚진 일본의 신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무한할 것처럼 보였던 국가 일본의 경제번영은 더 이상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 신주쿠 역에서 무표정으로 고개 숙인 채 직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애써 변명하는 하루키의 모습이 그저 애처롭게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읊조리는 우리는 우리였다라는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하니 너희들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란다. 잘난 작가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역시 소설 <다자키 쓰쿠루>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마지막 남은 올드 멤버 구로/에리를 찾아 나선 핀란드 여행이다. 그것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피아곡의 선율에 따라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진실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순례에 나선 쓰쿠루에게 여행 자체가 주는 치유의 시간이다. 그리고 독자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어떻게 해서 쓰쿠루가 모임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핀란드 여행에 앞서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라가 중년남자와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지만, 그것조차 이미 막바지에 달한 소설에서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동안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그전보다 더 단련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정신적으로 더 잃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일까? 그렇게 소설은 열린 결말로 내달린다.

 

싸구려 힐링과 멘토링이 범람하는 시기에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떤 종류의 치유를 기대했다면 그건 어쩌면 난망한 기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재밌게 잘 읽히는 글쓰기 실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하루키 특유의 섬세한 도회적 스타일 구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하루키가 통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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