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하루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나의 책읽기는 그 책에 대한 단서 찾기로 시작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태리 출신 여류작가 멜라니아 마추코(Melania Mazzucco)의 <어느 완벽한 하루>를 읽기 위해 우선 책의 처음에 나오는 노래 가사의 주인공인 루 리드가 부른 <Perfect Day>를 찾아서 들어봤다. 글램록 밴드답게 몽롱한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다는 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소설을 읽을수록 과연 24시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했다.

<어느 완벽한 하루>는 1996년 작가로 데뷔한 멜라니아 마추코의 5번째 작품으로 (2001년. 마릴린 맨슨의 체포사건으로 추정한) 5월 4일 금요일 만 하루 동안 이탈리아 로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사건들을 시간단위로 파헤친다. 작가는 캐릭터보다는 사건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5월의 어느 날 밤, 로마의 밤거리에 총성이 들린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 주민은 경찰에게 신고를 한다. 그 사건이 발생한 24시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24시간 단위로 세밀하게 나뉘어진 시간 속에, 작가는 부오노코레 가족과 피오라반티 가족들을 밀어 넣는다. 매력 넘치는 아내 엠마에 대한 지독한 편집증세로 결국 이혼한 안토니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스토킹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무엇보다 소중한 자식들인 발렌티나와 케빈마저 빼앗겨 버린다. 그에 대한 증오를 자신의 장모인 올림피아에게 맹렬하게 내뿜는 안토니오. ‘저러다 일내지’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한편 그런 안토니오를 수호천사로 생각하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잘 나가는 정치인 엘리오 피오라반티와 그의 아내 마야 그리고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 카밀라가 있다. 아, 그들의 삶에 잉여물처럼 따라 붙은 전처에게서 낳은 아들 제로/아리스가 있다.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 모두를 갖추고 있는 피오라반티 패밀리는 부오노코레네들에 비하면 훨씬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 마추코는 이렇게 대조적인 가족들을 소설에 배치했을까. 그건 아마도 너무나 상반되는 이들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리얼리즘의 극대화를 위한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안토니오의 딸 발렌티나는 한창 발랄한 십대소녀로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물질적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 물론 그건 엠마와 케빈 역시 마찬가지다. 불타는 사랑만으로 결혼했던 엠마는 안토니오와의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다. 거의 의처증 수준에까지 다다른 안토니오는 증오로 똘똘 뭉친 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인 엘리오를 경호하고 있는 경찰이자 서민들의 영웅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훌륭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엘리오의 젊은 부인인 마야는 어느 모로 보나, 뛰어난 재원이지만 남편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진가를 펼쳐 보이지 못한다. 어느새 30세가 된 그녀는 초조해하며, 결혼생활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 틈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이십대 초반의 제로/아리스는 도시 게릴라 같은 삶을 살면서도, 자립하지 못하고 언제나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낸다.

여기에 발렌티나의 국어 선생님인 동성애자 사샤까지 등장하면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물군은 완벽하다. 자 이제 캐릭터들이 준비되었으니, 사건에 불을 당길 성냥 한 개비만 있으면 되는 건가? 유럽 선진국 중에서도 참 얄궂은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로마의 거리들을 배경으로 진정한 가족애에 대한 변주곡이 느릿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어느 완벽한 하루>를 읽기는 쉽지가 않다. 우선 뉴욕이나 도쿄 같이 우리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로마라는 배경이 그렇다. 로마 제국의 유적들이 흐르는 천년 도시 로마는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 대도시치고는 형편없이 좁아터진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판테온 옆의 가게에서 자신의 앞으로의 미래를 모른 채 하염없이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부오노코레들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

7살 난 엘리오와 마야의 딸 카밀라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호화판 결혼식은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히려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안토니오와 엠마의 치열함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참 카밀라가 어떻게 해서 케빈에게 반하게 되었지?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주인공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이어진다.

결말로 달려갈수록 독자들은 설마 했던 일들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그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가진 일말의 희망마저 산산이 부숴 버린다. 그리고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시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너무 작아서 후하고 숨을 내쉬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런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놓는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콘텐트들을 비주얼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터키 출신의 감독 페르잔 오즈페텍이 이 소설을 영화화한 <운수 좋은 날>을 보고 싶다는 거였다. 현진건의 동명의 소설 제목처럼 참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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