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자크 스트라우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을 그리고 새로운 문학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도전 의식이 뿜뿜하는 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 책은 민음사 모던 클래식에서 나온 책인데, 절판됐다. 절판돼서 이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의 원제를 해석하면 <잭 필제의 수상쩍은 구원> 정도가 될 것 같다. 제목에 등장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바로 11세의 소년 잭 필제다. 이 발칙한 꼬마 녀석은 9살 때부터 마스터베이션의 세계에 잠입했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수지 마피사를 자신의 제2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이 녀석이 진짜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주인공 잭 필제의 인종적 배경으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 빌럼은 변호사 출신 법조인이다. 나중에 사형 제도가 폐지된 다음에는 판사가 된다. 그는 아프리카너 그러니까 보어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그러니까 잭은 어려서부터 남아프리카라는 문제적 국가에 사는 ‘하이브리드’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보어전쟁을 치를 정도로 아프리카너와 영국인들은 앙숙이었지. 그리고 그 밑에는 그들 공통에게 차별받는 흑인들이 있었고. <구원>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점 중의 하나는 십대 초반의 꼬맹이들이 자신의 엄마 뻘 되는 흑인 아주머니의 노동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때는 1989년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공산주의가 몰락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보호령이라고 생각하는 나미비아 건너 이웃나라 앙골라의 좌파정권이 불안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러시아 아니 그 당시 표현으로는 소련인들은 그들에게 악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은 앙골라에서 MPLA 정권을 상대로 정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조나스 사빔비의 UNITA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설적 우파 게릴라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의 이름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사실 사빔비라는 이름 때문에 책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의 생애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오래 전, 신문 기사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다룬 너튜브 영상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걸 보면 마냥 너튜브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발칙한 꼬마 잭 필제는 붉은 베레모의 전설적 게릴라 투사 사빔비에 마음에 빼앗겼던 모양이다. 사빔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 리뷰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무난해 보이던 꼬마 잭의 일상에 수지의 아들 퍼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왠지 꼬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혼자 재미(?)를 보던 잭은 퍼시에게 수치스러운 순간을 들키게 되고, 퍼시를 쫓아내 버리고 만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을까? 결국 수지의 곁을 떠난 퍼시는 대형 사고를 치고 잭이 자신에게 제2의 엄마라고 생각하던 수지마저 필제 가정을 떠나게 된다.
사빔비에서 갑자기 엔딩으로 치달아 버렸지만, 그 와중에서도 잭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백인 가정에서 하녀로 일하던 이들이 좋아서 백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했을까? 전혀 아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는 유색인종들이 할 수 있는 그것 밖에 없어서였다. 그래서 수지는 아들 퍼시에게 그렇게 종합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가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한 것이었다. 대학 진학이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을 진 몰라도, 퍼시처럼 대형사고를 치는 건 최소한 막아줄 수 있을 거라는 주술적 믿음에서 말이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보니 잭의 친구 아버지도 뱀에게 물려 갑자기 죽었다고 했던가? 아니면 자신의 아버지 빌럼이 독사 “블랙 맘바에게 물리는 환상을 겪었었나. 인종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수지 아줌마는 잭에게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해 보려면 다시 책을 뒤적여 봐야 하는데 귀찮다. 어떤 이미지들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의 기억의 저장고에 남게 되는 건지도. 이 또한 내 맘대로 그리고 오독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잭의 절친 페트뤼스네 가정은 전형적 보어인 가정을 소설에서 대변한다. 영악한 페트뤼스는 친구 잭에게 세상살이의 실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쇼핑몰에서 점잖은 백인 아주머니들을 도와주고 부족한 용돈벌이를 하는 법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페트뤼스였다. 이 녀석들 하여간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여성적 이미지의 페트뤼스였지만 움 프릭(페트뤼스의 아버지)과 함께 나선 사냥에서는 개코원숭이의 얼굴 반쪽을 날려버리면서 진정한 아프리카너로 거듭나게 된다.
이 장면은 소설의 어디선가 잭의 누나 리사가 바닷가에서 상어잡이 아저씨와 대판 싸우는 장면과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기시감이 들었다. 이것을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고 봐야 할까? 잭의 아버지 빌럼까지 나서서 드잡이질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소년 잭 필제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이다. 왜 아프리카너들은 남아프리카의 땅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그 땅의 원주인들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돌아갈 고향의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이 새로운 안식처라고 그곳을 정하고 나름대로 만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고약한 방식의 차별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 비정상인 나라에서 구원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