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넷플릭스가 다 해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초창기 시절의 넷플릭스는 온라인으로 DVD를 빌려 보는 그런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보너스도 영화 보면서 먹으라고 아마 전자렌지에 돌려 먹는 팝콘도 한 봉지 보내줬었자. 비디오나 DVD로 영화 보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고 모든 게 스트리밍이 잡아먹었다. 모든 콘텐츠는 이제 소장보다 정말 시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보고 잊어 버리게 되는. 물론 나처럼 여전히 소장에 목 매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난 주말에 본 넷플릭스 <길복순>은 클리셰이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혹평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전도연이 맡은 전설의 킬러 길복순은 너무나도 뻔하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작 <킬 빌>의 브라이드가 연상됐다. 특히 엔딩에서 엠케이엔터의 대표 차민규(설경구 분)와 싸우기 위해 일본도를 들고 엠케이 본진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공통점은 아주 현란하게 펼쳐지는 폭력과 유혈이고.

 

어디선가 보니 액션 영화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또 액션을 뺄 수 없는 그런 장르영화가 아닐까 싶다. 일단 오프닝부터 화려하지 않은가. 일본 야쿠자 출신의 오다 신이치로(황정민 분)가 길바닥에서 깨어난다. 간사이의 호랑이(토라)라고 했던가. 열도 출신의 토라와 반도 출신의 여성 킬러 사이에 일합이 이루어진다. 간사이 호랑이는 살벌한 일본도로 그리고 우리의 킬복순 씨는 이마트에서 산 3만원짜리 도끼로 맞선다. 이것도 PPL로 봐야 하나. 참 마트 문닫을 시간이라 오다 씨에게 총알을 선사하고 깔끔하게 현장을 떠나는 복순 씨.

 

그리고 보니 넷플릭스는 국내 공중파 방송들의 막무가내식 PPL 대신 요소요소에 세련된 방식의 광고를 들이민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이네켄을 마시는 장면에서는 나도 당장 뛰쳐나가 하이네켄을 사와야 하나 1분 정도 고민을 했다. 물론 나의 게으름은 그걸 용서하지 않았지만 말이지.

 

엠케이 엔터 소속 전설적 킬러 복순 씨의 문제는 살벌한 킬러들과의 대결이 아니다. 아니 그녀는 절대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트 문닫을 시간이나 딸 길재영의 사교육에 신경쓸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다. 킬러 세계가 <길복순> 서사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킬러 비즈니스 못지않게 빡센 육아 혹은 자녀 교육의 세계라는 게 아닐지.

 

아이돌들이 7년 계약이라는 마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복순 역시 재계약 시즌에 돌입했다. 그리고 은퇴를 생각 중이다. 아마 그동안의 업보로 자신들이 구원받을 일이 없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걸까? 엠케이 엔터의 또다른 실력자 차민규 대표의 동생 차민희는 철저한 비즈니스 우먼이다. 자기 회사의 에이스 복순 대신 새로운 인물들로 세대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뚝심으로 밀어 붙인다. 그렇다면, <길복순>에서 빌런은 차민규라기 보다 배후조정세력인 차민희가 아닐까.

 

한편, 재계약을 앞두고 차민규는 자사의 최고 에이스 복순에게 두 건의 의뢰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한다. 서울과 블라디보스톡. 아마 후자를 선택했다면, 안온한(?) 복순의 일상이 유지될 수 있지 않았을까? 고의로 의뢰를 실패한 킬러는 업계에서 세운 규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건 안비밀이다. 사실 이 또한 엠케이 엔터가 군웅할거하고 무적자 킬러들의 난립을 막고 독과점하겠다는 선언의 다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 그렇구나, 독과점은 모든 사업가들이 꿈꾸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심지어 살입청부업계에서도.

 

데뷔를 앞둔 엠케이 인턴 김영지와 사건 처리에 나선 복순은 의도적으로 실패하고 그녀의 위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아니 이미 위기는 그전부터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싱글맘인 복순은 딸 길재영과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녀에게는 킬러 사업보다도 더 어려운 게 아마 아이 키우기가 아닐까 싶다. 이 또한 하나의 유머 코드로 읽어야 할까? 그만큼 아이 키우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게 아닌지.

 

길재영이가 학교에서 벌이는 사건 사고는 복순이 마주하게 된 위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길재영의 세계에서는 또 다를 지도 모르겠다. 엠케이 차민희 이사는 의뢰에 실패한 복순을 제거하라는 오더를 날린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희낙락하던 킬라 동료들은 엠케이의 공식 오더를 받는 순간 바로 돌변해서 복순을 죽이려고 달려든다. 아니 인생사란 이렇게 비정하단 말인가. 특히나 킬러들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다구리를 당할 판이었던 복순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인턴 김영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길복순>에서 가장 마음에 든 액션 시퀀스였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차민규 대표와의 일전에 나선다.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까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물어 보니 혹평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킬 빌>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니까, 어쩌면 뛰어난 여성 킬러가 등장하는 <길복순>은 출발부터 타란티노의 <킬 빌>의 여전사 우마 서먼과 싸워야 하는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아류작이 되었다. 그 외의 숱한 클리셰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너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담으려다 그만 이도저도 아닌 잡탕밥이 된 건 아닌지 좀 아쉽다.

 

[뱀다리] 영어 제목 Kill Boksoon이 지닌 의미도 아주 간단한다. 복순을 죽여라. 길복순의 언어유희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지에 대해 암시하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복순이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오다 신이치로와의 대결에서도 그리고 엔딩의 차민규 대표와의 대결에서도 언제든 상대방에게 당할 수 있다는 암울한 미래상 역시 어디 다른 영화에서 차용한 거라고 하던데, 귀찮아서 찾아보지는 못했다. 영화에 대한 나의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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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4-19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것 봤어요!! 전 전도연 팬이지만 솔직히
그녀의 이미지가 <일타강사>에서 본 것과 그닥
변함이 없어서 실망했어요...
더구나 언급하신 모든 것들에
동의하고...
그리도 <킬 빌>을 넘어설 순 없겠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가 높이 사는 것은
전도연 딸아이의 평범하지 않은
커밍아웃(?)이에요.
한국의 사고방식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괜히 좋더라구요.^^;;

레삭매냐 2023-04-19 15:24   좋아요 0 | URL
전도연 배우의 연기 변신 도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
해주고 싶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킬 빌>을 넘어서기란 진차 -

언급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사고가 유연해지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페넬로페 2023-04-1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평이 많아 보지 않기로 했는데 레삭매냐님의 리뷰로 보고 싶은데요 ㅎㅎ

레삭매냐 2023-04-19 15:26   좋아요 2 | URL
저도 혹평 때문에 걱정을 하긴
했는데, 나름 갠춘하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

coolcat329 2023-04-19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복순 봤어요. ㅎㅎ
제가 타란티노의 팬인데 여기서 너무 많이 보이더라구요.
시덥잖은 대화 나누다 갑지기 폭발하는 장면이나, 설정은 킬 빌이랑 참 비슷하죠.
후배 킬러 상대로 매직팬 가지고 싸울 때는 본 시리즈 맷 데이먼 싸움하고 비슷했구요.
근데 무엇보다 왜 이리 촌스럽게 보이는지요.
저는 많이 실망했답니다.

레삭매냐 2023-04-19 16:38   좋아요 1 | URL
앗 그리고 보니 인턴 킬러
와의 대결에 매직펜 뚜껑샷이
제이슨 본을 모방했나 보네요.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싶었는데 말이죠.

어느 장면에서 참 시덥지 않
다해서 빵 터졌었는데... 기억
이 나질 않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4-20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고 하시니 궁금하네요ㅎ

레삭매냐 2023-04-29 09:51   좋아요 1 | URL
호평 대신 혹평이 더 많은 느낌
이지만, 전 그런 대로 만족하는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