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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사진가
플로랑 실로레 지음, 임희근 옮김 / 포토넷 / 2017년 8월
평점 :
어느 책들은 도서관에서 관외대출이 되지 않는다. 딱 일주일 전에 읽기 시작한 전설적인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일대기를 그린 그래픽노블이 그런 책이었다. 장장 이주일에 걸쳐 도서관에서만 읽는데 성공했다.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엔드레 에르뇌 프리드먼이라는 본명으로 출생한 로버트 카파는 베를린에서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히틀러가 집권하자 파리로 무대를 옮겼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연설 사진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파리 시절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미국식 이름이 자신의 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파악한 그는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기에 이른다.
카파가 전세계적인 종군 사진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스페인 내전 취재였다.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총탄에 맞는 순간을 포착한 <어느 병사의 죽음>은 그야말로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그런 사진이 되었다. 그래픽노블에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의 조작 논란에 대해 다루지 않은 점이 아쉽다.
스페인 내전에 동행한 카파의 여자친구 게르타 타로는 그 못지않은 사진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파리에 간 있는 공화파 전차에 깔려 중상을 입고 죽었다. 타로가 찍은 사진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은 시대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헝가리 시절부터 그는 좌파 활동을 했는데, 스페인 내전에는 거의 공화파로 참전했다고 훗날 냉전기의 미국 관리들은 간주한 모양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귀화해서 시민권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로버트 카파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종군 사진가가 된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되었지만, 도박과 경마 그리고 흥청망청하는 씀씀이로 비판받기도 했다. 아마 어쩌면 이런 것들이 스페인에서 죽은 게르타 타로를 상실한 데서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위장결혼을 통해 영주권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 편에 선 적성국가 헝가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재에 제한을 받고 카메라를 몰수당하기도 한다. 어쩌면 사진 촬영이라는 것이 진실을 전달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 기술이기 때문에 사진이 창출해내는 유불리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에도 종군 취재에 나섰지만,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부하들에게 엄명을 내려 로버트 카파의 최전선행을 전력을 다해 막았다. 항상 가장 좋은 전쟁 사진은 최전선에 나온다고 굳게 믿었던 카파는 어쩔 수 없이 전선 후방의 모습들 밖에 다룰 수가 없었다.
도미 초창기만 하더라도, 뉴욕에서 식당사진이나 찍을 수밖에 없었지만 천생 종군 사진가였던 카파가 있을 곳은 역시나 바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였다. 토치 작전으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미군을 따라 다시 전장에 복귀한 카파는 이태리 전선의 격전지였던 몬테카시노에도 투입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불법과 합법의 미묘한 경계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종군 사진계의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었다고 할까.
카파를 불멸의 종군 사진가로 만든 다음 무대는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미영 연합군이 마침내 서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나치 독일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2전선을 전개한 것이다. 이 위험천만한 상륙작전 당일에 카파 역시 독일군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이 펼쳐진 오마하 비치에서 목숨을 걸고 방수처리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공수된 카파의 필름들을 현상하던 현상기사의 실수로 많은 필름들이 날아가 버렸다는 설이 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살아남은 몇 장의 사진들이 긴박했던 당시의 역사적 순간들을 증언해 준다.
1945년 5월, 베를린 함락으로 마침내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카파는 베를린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은막의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파의 다음 무대는 할리우드였는데, 평생 종군 사진가로 활약한 그에게 영화 현장 사진이나 찍으라는 미션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이 즈음 미국의 문호 존 스타인벡과 소련 취재여행에도 나서게 되지만, 스탈린 정권의 엄격한 통제로 중국에서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도 사진 촬영에 나섰다가 허벅지에 유탄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48년에는 17년 만에 자신의 고향 부다페스트에도 방문했다.
한편, 종군 사진가들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과 자신들의 노력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카파는 1947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같은 저명한 사진가들과 협동조합 방식의 <매그넘>을 설립하기도 했다. 사진 업계의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한 선구자 같은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1954년 일본을 방문하던 중,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지던 베트남 취재를 의뢰받은 카파는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 40세의 종군 사진가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뒤 베트남에 도착해서 자신이 활약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1954년 5월 25일, 카파는 프랑스군 부대와 행군 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최고로 위험한 전쟁터를 누빈 불사조 같았던 종군 사진가의 최후였다.
아주 오래 전에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에 실린 카파의 사진들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좋은 사진을 위해 현장에 가까이 가라는 자신의 명언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고, 카파는 불멸의 역사적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다. 플로랑 실로레 작가가 전장을 누비는 카파의 용감무쌍한 모습과 도박이나 경마 혹은 방탕한 생활이라는 인간적 약점도 동시에 그래픽노블을 통해 보여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