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블러드 : 벌거벗은 여왕님


우연히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희대의 사기꾼에 대한 콘텐츠를 접하게 됐다. 최근 테라-루나 스테이블코인 폭락 사태로 그 개발자가 제 2의 엘리자베스 홈즈가 아니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실물을 담보하지 않는 가상화폐가 얼마나 위험한 투기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그런 시간들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모든 비범한 기업의 성공에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법이다. 애플의 잡스 선생은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해서 아이폰이라는 시대의 발명품으로 판을 뒤흔들어 버렸다. 그 시절에도 이미 많이 들은 말이지만, 아이폰이라는 게 모두 기존에 있던 기술을 짜깁기해서 만든 게 아니던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 말을 잡스 선생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일론 머스크 역시 어린 시절에는 망상가라는 평을 들었지만, 잡스 선생의 뒤를 이어 잘 나가는 스타트업을 상징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여전히 코인 사기꾼인지 아니면 혁신의 아이콘 같은 사업가인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평이 있지만.

   


자 여기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인물이 넥스트 잡스 선생이 되기 위해 도전장을 날렸다.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부모 대에는 예전만 하지 못했다고 했던가.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 화학과에 진학한 홈즈는 19세의 나이에 훗날 테라노스가 되는 <리얼-타임 큐어즈>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그녀가 개발한 에디슨 키트는 너무나 혁신적이었다. 온갖 질병 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한 양의 혈액이 필요했는데, 어려서부터 채혈 공포증에 시달리던 홈즈는 핏 한 방울(아마 그거보다는 많이 필요하겠지)로 무려 250가지에 달하는 질병에 대한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에디슨 키트를 개발해냈다.

 

전세계 스타트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비 유대계 젊은 백인 여성 CEO의 등장은 성공 서사를 위한 완벽한 충분조건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학벌도 스탠포드 중퇴라고 하지, 그야말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성공 서사가 시작될 판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막대한 투자금이 테라노스에 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넥스트 잡스의 꿈을 키우던 홈즈는 어려서부터 경쟁심이 강했고, 억만장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게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홈즈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 마케팅과 함께 모든 스타트업 선수들의 롤모델인 잡스 선생을 벤치마킹해서 검은색 터틀넥에 붉은 립스틱으로 무장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본격적인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2013년 미국의 거대 약국 체인인 월그린과 제휴를 맺으면서 홈즈가 이끄는 테라노스는 한 때 10조원에 달하는 기업 가치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투자금을 바탕으로 해서 진짜 기술 개발에 나섰더라면 좋았을 텐데 돈의 유혹에 눈이 먼 홈즈는 스타트업 기업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은 도외시하고 사기극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월스트릿저널 출신의 퓰리처상 수상기자인 존 캐리루 아저씨가 뉴요커에 실란 홈즈의 기사를 보면서 홈즈의 테라노스 제국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참 홈즈는 테라노스의 이사진을 헨리 키신저, 조지 슐치 그리고 제임스 매티스 같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로 채우면서 자신이 펼치는 사기극을 보다 더 신뢰할 만하게 꾸미는 데도 일조했다.

 

정밀한 의학 기기라면, 수년간 의과대학에서 연구를 거듭한 의사 출신이 맡아야 하는데 정작 홈즈에게는 그런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존 캐리루 작가가 탐사보도를 시작하면서 접촉한 전 테라노스 직원들이 엄격한 보안유지 각서 때문에 테라노스의 속사성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고 한다. 테라노스는 협박과 위협 그리고 해고로 이의를 제기하는 내부 직원들을 저격했다. 사실 이제 빌런이 된 홈즈를 상대로 막대한 소송비와 배상금까지 치를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일에 나설 인물들은 없지 않았을까.

 

<배드 블러드>의 저자 존 캐리루는 아담 로젠도프(일명 앨런 빌)이나 타일러 슐츠 그리고 에리카 청 같은 양심적인 내부 고발자들의 도움으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숱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20151016일 월스트릿저널에 존 캐리루가 테라노스 에디슨 키트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홈즈 제국의 추락이 시작됐다. 2016년에는 FDA의 긴급 테라노스 실태조사, 2018년에는 미국증권거래 위원회의 고소로 홈즈가 테라노스 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테라노스는 상장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홈즈는 총 11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대배심 평결에서 투자자들을 속인 4가지 죄목들은 모두 유죄 판정되었고, 4가지 환자를 기만한 죄들은 무죄를 나머지 3가지는 미결론으로 도출되었다. 홈즈는 존 캐리루가 자신에게 1억 달러 가까이 투자한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 가운데 하나인 월스트릿저널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의 탐사조사를 막아 달라고 했으나, 머독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머독도 악덕 사주는 아닌 듯.


홈즈의 경우에서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바탕으로 거짓말과 사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 버리게 되는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예전에는 권력으로 찍어 눌렀다면 새로운 세기에는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소송전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제압하는 세련된 방식이 동원된다는 걸 이 케이스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실제 타일러 슐츠는 테라노스를 상대로 한 소송전에서만 5억 원의 소송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금수저 집안 출신이었으니 다행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타일러 슐츠는 피 한 방울로 250가지 질병 검사를 해낼 수 있는 에디슨 키트 만큼이나,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으로 활약한 자신의 할아버지와 연세 지슷한 이사진 양반들이 홈즈의 생일파티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행시를 짓는 장면이 그렇게 비현실적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형힌 테라-루나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시장에서 계속해서 경고등이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눈먼 투자자들이 단기이득을 노리고 부나방처럼 투전판에 뛰어든다는 이야기가 정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배드 블러드>에는 독자들이 호기심을 품을 만한 모든 요소들이 한가득이다. 19세 소녀가 살벌한 경쟁이 펼쳐지는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기업을 설립해서, 저명한 경제기 <포브스>가 미국에서 가장 부자로 선정할 정도로 성공한 기업가가 되는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물론 기초가 없는 모래성을 쌓은 덕분에 성공만큼이나 몰라도 빨랐다. 화려한 성공만큼이나 몰락도 아찔했다. 최대 20년에 달하는 형량을 어떻게든 줄여 보기 위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낸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전 애인이었던 서니 발와니에 대한 폭로도 초현실적인 막장극의 완성도를 더 높여 주었다. 머독을 비롯한 숱한 투자자들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입혔지만, 벌거벗은 여왕님은 여전히 캘리포니아의 1,700만 달러 짜리 대저택에서 호화롭게 지내고 있는 후속 보도는 또 어떤가.

 

간략하게 엘리자베스 홈즈의 사기극 <배드 블러드>를 다뤄 보았는데 곧 영화도 제작될 전망이고, 애플에서는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드롭아웃>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최근 발표되었다. 과연 다른 미디어에서는 벌거벗은 여왕님이 어떻게 묘사되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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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5-19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제작되는 군요? <배드 블러드> 책으로 읽고 싶었는데
레삭매냐님 덕분에 진상을 어느정도 파악하게 되었네요.

확인도 없이 큰 돈을 투자한 투자자들...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가 물증보다 강력한
확신이 되었을것 같아요

헨리 키신저 충격입니다.

레삭매냐 2022-05-19 14:22   좋아요 2 | URL
영화에서는 제니퍼 로렌스가
홈즈 역할을 맡는다고 하네요.

왜 이사진에 얼굴 마담들만
있고, 진짜 전문가들이 없는지
투자자들이 의문을 표하지 않
았을까요? 묻지마 투자의 대표
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키신저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sijifs 2022-05-19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상당히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 제작 소식이라니 나중에 개봉하면 꼭 봐야겠군요

레삭매냐 2022-05-19 14:23   좋아요 2 | URL
존 캐리루 작가가 퓰리처상
을 두 번이나 받은 이유를
절실하게 알려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우선 <드랍아웃>부터
볼 생각이랍니다.

mini74 2022-05-19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거 기사였나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근데 이렇게 큰 사기를 친 사람들은 요즘은 이야기를 팔아서 또 부자가 되더라고요. ㅎㅎ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기도 크게 쳐야 되나봐요

레삭매냐 2022-05-19 17:42   좋아요 2 | URL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횡령액이
100억 이상이면 백퍼 집행유예
라고 하더라구요.

그 이하는 실형이구요. 그니까
해먹으려면 왕창~! 해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