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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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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로 하여금 사유를 많이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야말로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리드 누네즈 작가의 <어떻게 지내요>를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것 같다.
친한 회사 동료분의 아버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폐암이 발발하고 나서, 6개월 정도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는데 수년을 버티셨다. 동료의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면서, 상주인 동료는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팬데믹 시절의 비극이 아닌가. 당연히 문상을 가려고 했지만, 고인의 친척분들이 만류하셔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찾아뵙지 못했다. 마음이 참 그랬다. 나도 이런데, 상주는 오죽했을까.
우리 인간은 모두 죽는다. 다만 그 죽음의 시기를 알지 못할 뿐이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말이 참 절절하게 다가온다. 아주 건강하시던 나의 큰아버지도 어느 날 복부 깊숙하게 자리 잡은 암이 발견되시고 한달여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진단에서 장례까지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경황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돌아가는가 보다.
시그리드 누네즈 작가의 <어떻게 지내요>에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결국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저널리스트 출신 “친구”가 등장한다. 그냥 죽음 앞에서 모든 결심들은 소용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불공평할 수밖에 없지만 단 하나, 죽음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결국 존재의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자꾸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레플리컨트들이 사투가 떠올랐다. 결국 최강의 전사 로이 배티는 빗속에서 데커드와 싸우다가 조용하게 소멸하지 않던가.
누네즈 작가는 죽음을 앞둔 친구라는 대전제를 깔고, 어디서고 들었음직한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직조해낸다. 그리고 화자인 나에게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죽음의 동반자로 간택받은 것이다. 친구는 삶이 주는 파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안락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친구는 알약 하나만 삼켜서 삶을 종결시키면 되지만, 뒤에 남은 나는 온갖 궂을 일들을 도맡아야 한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의 그런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기도 그렇다고 해서 번잡한 사무들을 감당할 자신도 없어 보인다. 나로서는.
만약 나에게 그런 미션이 주어진다면 나는 소설의 화자처럼 담대하게 그런 요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기묘하게도 엉터리 대통령을 지지한 남부 연안의 공화당주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친구는 대신 뉴잉글랜드의 호젓한 곳을 고른다. 이건 작가가 구사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고도의 유머인가. 하긴 평소에 민주당을 지지하던 이들도 연세가 들어 하도 폭스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오른쪽으로 갔다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파렴치하게 거짓 뉴스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퍼 나르는 대중 매체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는 그런 텍스트가 아닌가 싶다.
친구는 이미 소원해진 딸 대신 나를 파트너로 골랐다.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신중한 선택이었을까? 아니 그렇다면 간택 받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친구의 모습에서 무슨 할 일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고, 또 잘 먹지 못하는 친구와 달리 어떻게든 잘 먹겠다는 의지에 넘치는 나의 모습에서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나 싶다. 그런데 화자는 그렇게 친구와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 오래 전에 사라진 우정이 걷잡을 수 없이 다시 생성되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 않던가.
<어떻게 지내요>는 불어에서 온 표현으로, 무엇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가라는 표현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보니 한동안 지인들에게 최근에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묻던 시절이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언제 행복했는지 나에게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행복한 순간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가 만약에 최근에 언제 가장 고통스러웠고 그 이유는 뭐였냐고 물었다면 선의로 시작한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한다. 사실 상대방의 그런 고민이나 고통에 대해 내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았을까. 아니 그냥 화자처럼 죽어가는 친구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친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을까. 아니 그것조차 친구가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이었을 수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화자의 마음에 어느 순간, 찌릿한 동통을 수반한 감정들이 등장한다. 왜 살다가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기억의 저편에 꼭꼭 묻어둔 감정들이 갑자기 연쇄적으로 폭발하듯 솟구치는. 그럴 때면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동통들이 물러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더라. 망각의 저편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언제나 그렇듯, 모든 존재의 소멸은 슬프고 애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