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비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알라딘 동지들을 통해 크레이그 톰슨이란 작가를 알게 됐다. 가차 없이 인근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책들을 빌려 왔다. 지난 주말에 <만화가의 여행>은 읽었고, 바로 그의 2011년 역작 <하비비>를 읽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도 읽고 있는 중이다. 도서관은 정말 우리 책쟁이들에게 보고가 아닐 수 없다.

 

그래픽 노블 <하비비><만화가의 여행>과는 그 결을 달리 하는 작품이다. 와나톨리아(터키의 아나톨리아의 패러디일까?)를 배경으로, 주인공 도돌라와 잠이 등장한다. 도돌라는 9살 나이에 필경사 남편에게 매매혼으로 팔려 가고, 그 남편에게 신혼 첫날부터 폭행당한다. 그나마 늙다리 남편에게 얻은 위로라면 그가 도돌라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점 정도. 그리고 12세 되던 해에 그녀의 집에 침입한 강도들에게 남편이 살해당하고 도돌라는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된다. 정말 기구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곳에서 자신보다 9살 어린 소년 잠을 만나게 되고 같이 탈출해서 사막으로 향한다. 사막에 버려진 배에서 지내게 되는 두 사람. 사막이란 곳은 예나 지금이나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그런 척박한 환경이다. 도돌라는 그런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나가는 캐러밴들에게 몸을 팔고, 먹을 것을 얻는다.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해 가던 잠은 어느덧 여성이 된 도돌라의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그 둘의 관계는 참으로 이상하다.

 

근본주의자 집안에서 자란 크레이그 톰슨은 성경의 상당 부분과 유사한 코란에 주목한 것 같다. 그가 그린 그래픽 노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필두로 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구약 성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장자지만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막에 버려진 아랍인들의 조상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가 짠하게 다가온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도 코란에서는 아마 다르게 다뤄진 모양이다. 색다른 변주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막의 유령 매춘부로 널리 알려진 도돌라의 이야기는 하렘의 숱한 여성을 거느린 술탄의 흥미를 자극한 모양이다. 일단의 무리들이 도돌라를 잡아다가 술탄의 하렘에 바친다. 비록 가난했지만 사막의 배에서 잠과 자유롭게 살던 도돌라는 하렘에 갇힌 수많은 술탄의 후궁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만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도돌라에게 술탄은 70일간 자신에게 극한의 환락을 제공한다면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약속을 한다. 여기서는 왠지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셰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서사란 오래된 전임자의 변주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세상에 아주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나저나 그래픽 노블 <하비비>의 분량은 어마무시하다. 자그마치 672쪽이라니.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전에 만난 <만화가의 여행>은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었는데 말이다.

 

도돌라의 하렘에서의 생활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다음은 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차례다. 도돌라가 그들의 거처였던 배에서 사라진 뒤, 잠은 도시의 이상한 집단에 흘러들었다가 그만 남성성을 잃게 되고 만다. 도돌라가 술탄의 하렘에 든 것처럼, 잠 역시 술탄의 궁정에 환관의 신분으로 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은 자신의 운명이었던 도돌라와 재회한다.

 

저자 크레이그 톰슨이 구사하는 강렬한 주제의식에 편승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형상화된 아랍 문자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해 보일 뿐이다. 특정 국가와 언어에 편향된 교육 탓이라고나 할까. 근본주의자로 자란 저자는 어쩌면 자신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종교의 근본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그래픽 노블 <하비비>의 최고의 컷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도돌라와 잠은 술탄의 하렘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병을 얻은 도돌라는 그야말로 사경을 헤맨다. 그리고 잠의 헌신적인 간호와 사랑으로 드디어 죽을 고비를 넘긴 도돌라는 생존에 성공한다. 그들은 예전의 보금자리였던 사막의 배를 찾아가지만 그곳은 이미 도시의 쓰레기 처리장이 된지 오래였다. 결국 그들은 도시 와나톨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대 도시의 익명성에 기대면서, 일자리도 찾을 수 있었고 또 황량한 사막보다 살기에 더 낫다는 판단이 아니었을까.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솔로몬의 재판에 대한 아랍식 해석도 흥미로웠다. 하나의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는 크레이그 톰슨의 다르게 보기가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물론 이것도 원전을 알기에 비교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거세된 함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도돌라가 잠의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자, 좌절한 함은 그녀를 떠나 거대한 댐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다시 도돌라에게 돌아온 잠은 보트와 노예 소녀를 데리고 새출발에 나서는 장면으로 방대한 이 그래픽 노블은 끝난다.

 

<하비비>를 읽으면서 내내 나는 궁금했다. 과연 내가 저자인 크레이그 톰슨이 의도한 방향대로 따라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저자처럼 창작을 위해 아랍 문자나 문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거나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피상적 정보들에 의거해서 해석할 따름이었다. 하긴 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만. 미지의 분야에 대한 사유의 한계와 이해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독서였노라고 고백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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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2-22 1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두꺼운거 알고 있었지만 사진은 한800페이지쯤 되는것처럼 더 두꺼워 보여요.
이책 희망도서 신청했는데 어째 느낌이읽기 쉽지 않을거 같네요.
그림이 굉장히 강렬하네요.
저야말로 그림만 구경하다 덮는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

레삭매냐 2022-02-22 11:48   좋아요 4 | URL
도서관에서 보고 깜딱~ 놀랐답니다.

어마무시하게 두껍더라구요.
작가가 그림 그리다가 손이 나갈
지경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쿨카트님네 도서관에서는 구간도
희망도서로 받아주는가 봅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신간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ㅠㅠ

coolcat329 2022-02-22 17:51   좋아요 4 | URL
제가 사는 동네는 구간도 받아주더라구요. 근데 또 모르죠.일단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2-22 18:00   좋아요 4 | URL
더 부럽 ~

저희도 그러면 얼매나 좋을까요.

mini74 2022-02-22 17: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책이 두껍네요. 저희도 희망도서는 신간만 받더라고요. 고민중입니다. 3월에 살까말까 ㅎㅎ

레삭매냐 2022-02-22 18:00   좋아요 3 | URL
책이 아주 두껍습니다...

원서가 672쪽이라고 하는데
아마 국내서도 비슷할 겁니다.

장난 아니더라구요 :>

얄라알라 2022-02-22 18: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관절염을 호소하던 때는 이 책 그리기도 전인데......7년동안 완료하고 관절염 더 심해지셨을 것 같아요...워낙 그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들어가서..

레삭매냐 2022-02-23 13:4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
싸인회 보니 정성스럽게 일일히
그림을 다 그려 주는 것 같더라
구요. 역시 근본주의자다운 ^^

얄라알라 2022-02-22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관절염을 호소하던 때는 이 책 그리기도 전인데......7년동안 완료하고 관절염 더 심해지셨을 것 같아요...워낙 그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들어가서..

Jeremy 2022-02-23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raig Thompson 의 Graphic Novel 중
Black & White 은 좋아합니다. 전 총천연색 Graphic Novel 은 그닥.
더군다나 Thompson 은 지문을 죄다 Capitalize 하지 않아서
아무리 길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From the Divine Pen fell the first drop of ink˝
이 책은 이렇게 쓰면서 시작하는데
미국 다른 Graphic Novel 들은 지문을 죄다 대문자로 써서
정말 읽기 힘들거든요.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FROM THE DIVINE PEN FELL THE FIST DROP OF INK.˝
대문자로 다 쓰면 단어가 인식이 안 되는 자체결함이 있어서.

Craig Thompson 의 다른 책, ˝Blankets˝ 은
Habibi 보다 100장 정도 얇은데 이 책도 정말 좋답니다.
Habibi 좋아하시면 이 책도 강추.


레삭매냐 2022-02-23 13:54   좋아요 2 | URL
그러시군요 ^^

번역서에서는 로어 케이스와 캐피탈
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도 그래픽 노블은 올 칼라보다는
흑백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담요>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 책
은 먼 작은 도서관에 있어서 수급이
ㅋㅋ 아니면 저희 집 근처 배송을 요
청해볼까 합니다.

미리보기로 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유부만두 2023-09-21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하비비 읽고 왔어요. 담요가 기독교 체험이었다면 하비비는 기독교 이슬람( 인도, 티벳) 문화 탐구 같았어요. 역동적 장면들이 인상 깊었고요,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