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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왕자 - 오르페우스호의 비밀 ㅣ 안개 3부작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0년 4월
평점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기 시작했다. 세상에 허명은 없더라. 역시 재밌었다. 결국 이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와 사폰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거지. 그런데, 2년 전에 작가는 대장암으로 이미 작고하셨다네. 55세, 한창 작가로서 책을 써주셔야 할 나이에, 안타깝다.
지난 토요일 영하의 날씨도 무릅쓰고 그의 책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네 권의 책들을 업어왔다. 그 중에는 사폰의 소설 데뷔작인 <안개의 왕자>가 있었다. <바람의 그림자>도 다 읽지 않았는데... 그런데 데뷔작이라고 하니 자꾸만 손길이 간다. 결국 <바람의 그림자> 첫 번째 권을 절반 정도 읽다 말고 새책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어제 오늘해서 다 읽었다. 마지막 부분은 오늘 출근길 버스에서 허겁지겁 읽었다.
서두에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안개의 왕자>는 청소년용 판타지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책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나는 생각한다. 그런 기준에서 <안개의 왕자>는 새내기 작가치고는 정말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작가는 나중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다음, 첫 책의 이곳저곳을 다시 쓰거나 고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었다는 말을 남긴다. 있는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고.
소설 <안개의 왕자>의 주인공은 13세 소년 막스 카버다. 시계공이었던 아버지가 어느 날 바닷가 마을로 이사선언을 하면서 막스의 모험이 시작된다. 사폰은 카버 가족이 살게 된 집의 이전 내력부터 시작해서 촘촘한 구성으로 222쪽을 가득 메운다. 일단 <안개의 왕자>는 가독성이 뛰어나다. 십대 소년의 눈을 통해 새로 이사 간 집 근처의 조각공원에 대한 미스터리부터 시작해서 등대지기 할아버지(72세)인 빅터 크레이가 양손자 롤랑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비밀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다양한 내러티브가 끝없이 등장해서 독자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막스는 동네 형인 롤랑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되고, 자신의 누이인 알리시아는 심지어 그렇게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롤랑과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삼총사가 된 십대 청년들은 25년 전 인근 바다에 침몰한 오르페우스호 그리고 미지의 주술사 미스터 케인과 맞서게 된다. 그리고 보니 침몰한 배의 이름이 오르페우스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수금의 명수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구해내온 이가 바로 오르페우스가 아니었던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은 그렇게 제각각 작가가 부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카버네 가족이 바닷가 집으로 이사한 이래 기괴한 일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우선 막내동생 이리나가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막스 삼총사는 침몰한 오르페우스호 부근에서 잠수놀이를 하다가 바다괴물처럼 등장한 미스터 케인의 마수에 빠져 익사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엔딩에 준비된 그야말로 화려한 대주술사와의 대결에 비하면 워밍업 정도라고나 할까.
모든 사건의 비밀은 롤랑의 할아버지 빅터 크레이가 알고 있었다. 미스터 크레이는 한 때 잘 나가던 영국 출신 엔지니어였지만, 운명이 인도한 미스터 케인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지독하게 꼬여 버렸다. 첫 번째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미스터 케인의 음모를 막기 위해 승선했던 오르페우스호가 침몰한 뒤, 유일한 생존자로 마을의 등대를 세우고 현재 조용하게 살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늙은 영웅처럼 주술사 케인과의 대결에서 무언가 보여줄 거라는 기대는 아쉽게 무산되었다.
현대판 파우스트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 케인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소원을 비는 이들에게 터무니없는 그런 요구를 한다.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소원 성취는 결국 소원을 말한 사람을 파멸로 인도한다. 그걸 눈으로 직접 목격한 빅터 크레이는 미스터 케인과의 거래를 한사코 피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 아니 숙명은 그를 옥죄어온다.
엔딩에 등장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대주술사와의 대결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곧바로 최근 전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을 사들이고 있다는 넷플릭스 생각이 났다. 넷플릭스의 자본이라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판타지 안개 3부작도 능히 영상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라는 삼박자로 무장하고 거대한 악에 맞서는 막스-롤랑-알리시아 삼총사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넷플릭스, 빨리 영화를 만들어 줘요.
나는 그렇게 <안개의 왕자>를 다 읽고, 다시 <바람의 그림자> 읽기로 복귀했다. 세간의 평들을 보니 사폰의 대표작인 <바람의 그림자>의 아우라가 그의 다른 작품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그런 형세다. <바람의 그림자>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지 결국 다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