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것 참 신기하다. 오늘 회사에 거래처 갑질의 일환으로 어느 은행에서 상조회 프로그램을 팔러 왔다. 우리는 그들을 약장수라고 부른다. 정말 여러 가지인데, 우리 동료들은 단 한 번도 가입한 적이 없다. 그런 식의 영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그런 식으로 까먹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도 이제 어느덧 나이를 먹어 부모님의 장례를 걱정할 나이가 되긴 된 모양이다. 평소라면 귀퉁으로도 들리지 않았을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누구든 부모님의 상을 당하게 되면 경황이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상조회 서비스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자그마치 100여가지에 달하는 장례용품 사기를 당하기 십상이라는 거다. 가령 예를 들면 27만원 짜리는 안동에서 만들어진 수의는 350만원으로 뻥튀기된다고 한다. 그러니 바가지 쓰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말일 것이다.

 

늘상 그렇지만 이번 삼천포는 1967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신 저자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 이야기다. 하도 길에 읽다 보니 처음에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보니 교사 자격시험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면으로 <남자의 자리>는 시작된다.

 

노동자 집안 출신의 아니 에르노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그들의 살아온 삶 대신 잘 나가길 바라신 모양이다. 하긴 세상의 어느 부모님들이 그렇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들보다는 잘 살길 바라지 않을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없는 빈민 노동자 계급에서는 오로지 양질의 교육 밖에는 길이 없다는 게 문제다. 돈이 좀 있다면 사업으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어려서부터 잘 나가던 딸은 사범대에 진학해서 국가의 지원과 장학금을 받으면서 잘 나가지 않았던가. 나중에 소설가로 대박을 내면서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한 마디로 말해 아니 에르노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정반대의 삶을 사셨다. 전후 리옹의 어느 작은 마을에 상점을 낸 에르노 패밀리의 삶은 당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처럼 신산하기 짝이 없었다. 점빵겸 카페로 얼마나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이웃 빵집에서 자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그마치 1킬로미터를 걸으셔서 다른 빵집에 가서 빵을 사다 먹었다고 하지 않던가. 바로 그런 기개를 가진 양반이 에르노의 아버지였다.

 

대처에 나가 성공한 딸이 그로서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하지만 환갑 즈음해서 병이 발발하면서 그렇게 기백 좋던 남자도 결국 죽음이라는 대단원으로 막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하긴 우리네 삶이 대충 그러하지 않던가.

 

<남자의 자리>의 어디에선가 만난 기억은 저항한다라는 표현이 왜 그렇게 와 닿던지. 오랜 시간들이 지나다 보니 나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작가가 아마 나와는 다른 생각으로 저항하는 기억에 대한 서술을 했겠지만. 두 분의 어르신들이 아이를 맡았을 때, 구원의 순간이 도래했다던가 하는 부분이 아주 절절하게 공감이 갔다. 시간은 때로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또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새롭게 느끼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남자의 자리>는 종언을 고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차례가 된다. 아버지와의 관계와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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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06 19: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책 저는 딱 두권, 이 책하고 단순한 열정 읽어봤는데 두 책사이의 간극에 약간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

레삭매냐 2021-09-07 16:4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단순한 열정>은
정말 충격적으로 읽었던 것 같습
니다.

<단순한 열정>에 비하면 <남자의
자리>는 순한 맛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