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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8월
평점 :

이달에는 원래 에밀 졸라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지난 일요일 날 도서관에 들렀다가 망센빠이의 책을 만나는 순간 나의 결심을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몇 페이지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에밀 졸라의 <꿈>에 앞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오래전, 우리 독서가들의 대선배인 망센빠이는 아르헨티나의 서점 <피그말리온>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알다시피 시력을 잃은 대문호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고. 독서가가 독서가를 알아본다고, 척 봐도 책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망센빠이의 글들을 보면서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형태의 구원도 얻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 나랑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 더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지난달에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망센빠이와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집에 묵혀 두었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을 찾아내서 읽었고, 추가로 <로빈슨 크루소>와 <보물섬>도 주문해서 읽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로 이사한 망센빠이가 만든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와 분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의 작은 집에 쌓아 놓은 책들에 대한 분류에 나섰다. 그렇다, 망센빠이의 뒤를 따라 액션에 나선 것이다. 망센빠이의 도서관에 비하면 나의 책더미들은 부끄러울 뿐이다.
신화의 세계에까지 확장해서 공간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시도였던 바벨탑 쌓기와 시간을 정복하려고 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에 대한 이야기는 짜릿할 정도였다. 그리고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내 속의 아우성들이 잠잠해지는 밤시간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사위가 조용해지는, 하지만 요즘은 그놈의 배달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밤의 평안이 깨질 데가 많다,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 같은 책쟁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들이다. 일찍이 몽테스키외가 한 시간의 독서라면 어느 종류의 스트레스도 이길 수 있다고 했던가. 앞선 현인들의 자취를 따르는 시간이 어찌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망센빠이는 모두 15개의 책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그야말로 현란한 독서가의 글쓰기 신공을 보여준다. 곳곳에 그의 책에 대한 사랑들이 담뿍 담겨 있다. 대영제국의 국립도서관장은 소중한 책들을 지키기 위해 가발이나 복장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지 아마.
망센빠이가 구사하는 서사를 따라가며 만나게 되는 내가 이미 읽은 책들에 대해서는 반가움이 앞서고, 그렇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아니 아직까지 내가 이런 책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이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또 한국에서 소개되지 않은 책들도 너무너무 많다. 그건 지난달에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으면서도 느낀 바 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책쟁이들에겐 배고픈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 인간은 거의 모든 순간에 책을 원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은 우리 인류를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다 개인이 보관한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책읽기는 또 돈이 드는 일이구나 싶다. 아는 지인은 소중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집 말고 다른 공간을 대여했다지.
나는 특정인에게만 공개된 도서관에 나는 반대한다. 물론, 도서관은 전적으로 정보와 책을 만나기 위한 공간이지 절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는 망센빠이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동네에서 도서관을 본래의 목적으로 만들겠다는 시장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법적 소송까지 불사했던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고, 도서관을 본래의 취지로 활용하겠다는 소수의 의견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은 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도서관은 예정대로 공부인이 아닌 독서인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지난주에 가보니 여전히 공부하는 이들이 많더라.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유대인들이 몇 안 되는 책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소중하게 돌려 보았다는 이야기 앞에서는 진짜 감동이었다. 지금 우리는 원하는 책은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가 있지 않은가. 너무 많이 읽어서 문제가 아니라, 허구한 날 독서 인구가 줄어든다고 걱정이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내가 읽은 책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망센빠이의 냉철한 분석에도 공감한다. 가끔 같은 책을 읽고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더 나아가 견강부회식 해석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소위 식자입네 하는 이들이 그럴 때마다 나는 식겁한다. 아무리 해석은 자유라고 하지만, 그런 식은 아니잖아.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는 가짜뉴스만큼이나 위험한 게 바로 그런 식의 왜곡된 해석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생산되는 정보가 너무 적어서 탈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서 문제다. 전 세계에서 매일 같이 생산되는 정보들을 모두 읽으려고 무려 83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소위 정보의 바다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문제는 그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취사선택하고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다. 그러니 내게 필요 없는 정보나 책들은 신속하게 배제해야 한다.
엄청난 장서를 자랑하는 망센빠이에게 사람들은 묻는다고 한다.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었느냐고. 그 질문에 우리의 망센빠이는 적어도 펴보기는 했다고 대답한단다. 그의 지혜로운 행동에서 나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책읽기도 중단하고 내가 가진 책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일단 601권의 책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224권 37% 정도였다. 그러니까 대충 봐도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더 많다는 거다. 물론 정리는 다 안됐다. 그러면서도 오늘 또 중고서점에 들러 뭐 살 책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안 읽은 책 337권의 압박으로 책을 사진 않았다. 작은 위로라고나 할까.

서재는 자신의 독점적인 주인에게 ‘에우테미아(euthymia)’를 준다고 한다. 세네카의 설명에 따르면 에우테미아는 그리스어로 ‘영혼의 행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늘 나는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해 작은 책더미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