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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평점 :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한 소설집이었다. <처녀들, 자살하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유일한 소설집 <불평꾼들>은 기대 이상으로 매혹적인 작품들로 가득했다. 작가가 30년 이상의 작가 활동을 하면서 발표한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이다.
<불평꾼들>은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다. 미국이고 한국이고, 참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는 한국의 방식이 있고, 미국에는 미국의 방식이 있는 법이지. 하지만, 어디에 살든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프랑스 출신 정치학자 토크빌을 인용한 <위대한 실험>에서 주인공 켄들 아저씨는 시카고에서 자신의 아버지 세대보다 더 잘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 프리랜서 작가에서 회사 공금을 횡령하는 범죄자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켄들의 단독범죄는 아니었다. 존 보이코의 회계사 피아세키가 공범이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보이코에게는 푼돈인 돈을 얼마 정도 삥땅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 그들은 공모에 합의했다. 나름 대비를 했지만, 교활한 자본가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켄들의 목줄을 조이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되는데, 과연 그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방향을 튼다면 극단적인 흉악 범죄로도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공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도 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신속한 고소>도 흥미로웠다. 어산지와 폴란스키처럼 어쩌면 평생 미국 땅을 밟지 못할 처지였던 영국 출신 물리학자 매슈는 대학 신입생이라고 생각한 십대 소녀 프라크르티의 덫에 빠졌다. 물론 그에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인도식 중매결혼의 위기에 처한 미국 소녀 프라크르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묘한 방식으로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장면 또한 미국식 스타일의 전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는 순간, 바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삶의 아주 기본적인 룰이 연상되기도 했다.
각각 다른 네 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변화무쌍한 뜰>도 흥미롭다. 실패한 결혼에 우울해 하다가, 친구네 집에서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아티초크를 따다가 삶의 활력을 찾는 친구(맬컴)도 있더라.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현지인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집주인을 은밀하게 유혹하는 여성 애니도 등장한다. 집주인 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짝퉁 손가락 유물로 애니와 뜨거운 밤을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애니의 친구 마리아의 태클로 숀의 기대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지 못하고 따뜻한 남쪽나라 플로리다에서 모텔 사업을 해보겠다는 달뜬 꿈을 꾸는 가장도 등장한다. 아마 보통의 아내였다면, 헛된 꿈을 꾸는 남자를 다그쳤을 텐데 그의 배우자는 아마 보살이었던 모양이다. 파탄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다시 복구해 보겠다며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커플도 등장한다. 조금 전형적이긴 하지만 결국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도달하게 된다. “나쁜 사람 찾기”야말로 가장 큰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열 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건 역시 <베이스터>였다. 더 이상 매력적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배우자를 찾기도 귀찮아진 40세의 토마시나가 주인공이다. 결혼은 하기 싫고, 아이는 갖고 싶어진 토마시나는 비상수단을 강구한다.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갖기로 한 것이다. 어 그리고 보니 얼마 전, 어느 방송인도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를 낳지 않았던가.
<베이스터>를 통해 전통의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거나 이제는 더 이상 가족 시스템에 유효하지 않다는 식의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다양성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니 좋든, 싫든 내가 아닌 타인이 추구하는 그런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토마시나의 전 남자친구였던 월리 마스라는 녀석의 깜찍한 장난질(!!!)로 토마시나의 플랜이 어긋나 버린다는 게 제프리 유제니디스 작가가 준비한 반전이다.
유제니디스 작가의 이번 소설집을 조남주 작가의 신간 소설집과 병행하면서 읽었는데, 과연 한국과 미국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먼 그런 문화적 상이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유제니디스의 작가의 소설집에서 느껴지는 고구마 필링이 조남주 작가의 소설집에서는 더욱 확장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30년이라는 작가 생활이 커버하는 삶의 무게와 서사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