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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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가을에 중고서점에서 알베르토 모라비아라는 전혀 알지 못하는 작가의 <경멸>이라는 책을 살 뻔 했었다. 그런데 왜 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 6개월 정도 지나, 이 작가가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선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 이래서 일단 책은 사두어야 한다. 당장 읽지는 않아도 말이다. 그래서 부근의 중고서점을 수배해서 사냥에 나서려고 했다가 귀찮아서 결국 지난 주일날 폐관 5분을 남겨 두고 도서관에 난입해서 책을 빌렸다. 폐관 5분 전이니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라는 도서관 직원분의 말이 아직도 나의 뒤꼭지를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다.

 

이탈리아 문학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본북스에서 나온 모라비아 시리즈의 서두를 장식하는 <경멸>로 모라비아 선생 읽기를 시작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연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모라비아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을 바탕으로 누벨바그의 기수였다는 장 뤽 고다르 연출로 <사랑과 경멸>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어렵사리 영화를 구해서 잠깐 보았는데, 여주를 맡은 당대 최고의 섹스 심볼 브리짓 바르도(맞다, 울나라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야만이라고 비난한 그 사람이다)는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퇴폐미 넘치는 소설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에밀리아가 환생하지 않았나 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리카르도 몰티니를 궁지로 몰아넣는 빌런 역의 바티스타를 맡은 잭 팰런스도 인상적이었다.

 

소설 이야기하기 전에 또 삼천포로 간 모양이다. 다시 원대복귀하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로마. 27세 몰티니는 2류 저널리스트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의 꿈은 극작가다. 하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아가 집을 사고 싶어 하는 소망 때문에 돈에 영혼을 팔았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로 집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갚아야 한다. , 2021년의 한국의 그것과 너무 닮지 않았나 말이다. 이래서 삶이라는 연극은 시공을 초월한다고 작가는 쓴 걸까? 그렇다면 그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설의 메인 스토리는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의처증 때문에 결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문제적 남자 몰티니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이 지성인이자 개화된 인간을 자처하는 먹물 타입의 인간은 아내의 무학을 깔보고 무시한다.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에밀리아이지만,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이 할 말은 하는 그런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입만 열면 아내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온갖 망상에 쩔은 착각과 엉뚱한 발상으로 아내를 의심한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쁘띠부르주아로서 자신의 무능력한 남성성, 무엇보다 아내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는 경제적 무능력함에서 오는 자신감의 결핍이 파국의 주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소설의 긴장 유발자이자 영화제작자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바티스타가 서 있다. 바티스타는 돈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원하지 않는 몰티니를 꼬셔서 서양 문학의 영원한 고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제작에 참여할 것을 종용한다. 물론 원칙주의자 젊은 꼰대 몰티니는 원전 그대로의 해석을 원하지만, 바티스타가 원하는 것은 당시 영화시장을 휩쓸던 할리우드 스타일의 장대한 지중해 스펙터클 영화다. 문제를 바라보는 출발점이 현격하게 다르니, 이 둘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리라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말 흥미로운 점은 위대한 서사 <오디세이>의 등장인물들이 소설의 세 축을 이루는 몰티니, 에밀리아 그리고 바티스타의 경우에 대입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바티스타가 감독으로 캐스팅한 독일 출신 레인골드가 개입해서 좀 더 명쾌한 해석으로 어리둥절한 독자들을 현란하게 리드한다. 그러니까 고대의 서사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교활한 율리시즈는 자신처럼 개화되지 못한여자이자 현모양처의 화신 페넬로페에게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싫증을 내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고향 이타카로의 귀환을 주저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여전히 아름다운 페넬로페 주변에서 들끓는 구혼자들의 존재도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나중에 짜잔하고 등장해서 그들을 모두 학살하는 마초주의의 원형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남녀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식 접근방식은 언제나 흥미롭기만 하다. 고대판 사랑과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고대에 구혼자 무리라는 빌런 그룹이 존재했다면 현재에는 잘 나가는 바티스타라는 가물치가 있었다. 아내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원하는 희곡 대신 당시 영화 제작에서 그다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시나리오 작가의 삶에 도무지 만족할 수가 없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아를 위해 희생한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이제 결혼한 지 2년 된 아내는 자신에게 무심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결국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무능력함과 배우자의 무관심이 사달의 원인이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자신의 아내 에밀리아게 접근하는 바티스타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 들여 몰티니와 에밀리아 일행은 카프리 섬으로 향한다. 카프리에서 몰티니 부부의 예고된 파국이 되돌아 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리고 만다.

 

대서사 <오디세이>의 결말이 해피엔딩이었던가? 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서사를 도입한 <경멸>에서 몰티니가 무엇을 할수록 그의 아내 에밀리아는 그의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쉴 새 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숨이 막히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이 몰티니의 가진 것 없음에서 오는 병이다. 몰티니에게 재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까? 자신의 고용주 바티스타 앞에서 몰티니는 그가 에밀리아에게 키스를 해도 남자답게 나서서 일전을 벌이는 그런 깡다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대출금 상환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적 주종관계에서 오는 위계가 청년 몰티니의 액션을 막아 버린 걸까. 내가 에밀리아라도 숨도 쉬지 못하게 자신을 압박하면서(때로는 목도 조르면서!) 끝없이 사랑타령을 하는 인간이라면 질려 버릴 것 같았다.

 

몰티니는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삶의 미세한 균열을 망상에 젖어 증폭시켰다.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몰티니의 망상 그리고 심지어 환상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요즘말로 하면 찌질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그런 망상과 결단력 부족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포용력의 부족이 진짜 문제였다는 것을 그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요즘 살았다면 사랑과 전쟁에 출연이라도 권해 봤을 텐데.

 

권태에 젖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마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환상적이었다. 그것은 영화문법으로 말하자면 근거리에서 컷 바이 컷으로 관찰하듯이 주도면밀하게 읽혔다. 이런 멋진 이야깃감을 픽업한 장 뤽 고다르의 혜안에도 감탄했다. 실존의 나를 그리스 서사 <오디세이>에 대입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방식을 차용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경멸> 이 소설 한 편으로 단박에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난 주말 동안 수배해둔, <권태>를 바로 읽기 시작했다. 보통 한 작가의 책 세 권 정도는 읽어야 감이 잡히는 편인데 연달아 <권태>까지 읽으면서 모라비아 선생이 장끼로 삼는다는 실존에 대한 권태와 무관심이라는 키워드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다. 주말에는 영화 <사랑과 경멸>을 볼까 생각 중이다.

 

[뱀다리] 오래 전 고생 끝에 카프리 섬에 갔지만, 시간이 늦어서 그 멋지다는 그린 그로토와 레드 그로토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저 지중해 시퍼런 물에 발 한 번 담았다는 사실 만으로 만족해야했다. 소설에 내가 가본 장소가 등장하니 참 반갑더라.


[뱀다리2] 본북스에서 모라비아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니 기대 중이다. 지금 절판된 <권태>도 구해서 읽고 있는 중이데 아주 흥미롭다. 책사냥꾼에게 절판된 책들은 하나의 도전이다. 신간도 좋고, 구간도 좋다. 그 다음에는 <로마의 여자>를 읽을 계획이다. 신간이 어서 나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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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3-19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준비중이라니 기쁜 소식입니다!!

레삭매냐 2021-03-19 10:02   좋아요 3 | URL
인스타에서 역자 분의 피드를 보니
<아고스티노>하고 <순응주의자>
라는 책이 나올 듯 합니다.

본북스와 문지에서 출격 대기 중...

<권태>는 이현경 교수님이 번역해
주셨는데, 아주우!~ 좋습네다.

scott 2021-03-19 1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책사냥은 이딸리아로 넘어 가셨네요. 시리즈 제발 중단 하지 말고 출간해주길!!

레삭매냐 2021-03-19 10:04   좋아요 5 | URL
게으름뱅이 출판사가 작년에 낸다고
했었는데, 해가 넘어가 부렀네요 에잉 -

이딸리아 띠아모 ~

그러고 보니 월초에 만났던
루이지 피란델로의 책도 좋았습니다.

앗 그리고 보니 디노 부차티도!

얄라알라 2021-03-21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띠아모까지는 따라갔는데,
이탈리아 작가 이름들 모두 생소하네요. 발음도^^

레삭매냐님^^ 책을 직접 안 읽은 저로서는, 본격 소설 이야기도 재밌지만
˝삼천포˝라 하신 전반부, 너무 재밌어요. 자주 ˝삼천포˝행 해주시와요

레삭매냐 2021-03-21 08:44   좋아요 1 | URL
이건 여담인데 예전에 대학 시절
경남쪽으로 답사를 갔답니다.

진주로 이동하는 길에 진짜 삼천포로
빠져서 다들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짜 삼천포로 갈 뻔...
호랭이가 담배 먹던 시절 야그네요.

개인적으로 너무 한국의 번역물이
너무 영미 그리고 일본에 치중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