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7 -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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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리뷰란 책을 읽고 나서 바로바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번 경우처럼 미루다가 열흘이나 지나서 리뷰를 쓰게 되면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굽시니스트 작가의 책을 연초부터 마구 달리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일단 책은 읽고, 리뷰는 한참 뒤에나 쓰게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는 자기확신으로 힘차게 출발해 보자. 일단 스캔으로 리뷰에 앞서 훑어 보았다.

 

일단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정권을 차치하는데 성공했다. 기백년 동안 조선 국가를 좌지우지해온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대원군은 곧바로 개혁정치에 돌입한다. 가장 문제였던 전정, 군정 그리고 환정을 개혁하고 조선 후기 적폐의 온상이었던 서원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철폐령을 내려 일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미 국운이 기운 조선에 그런 처방들은 그저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웃 일본의 예를 따라 보다 근본적인 국가 개조에 나섰어야 했는데, 조선 군왕의 아버지가 실시하는 개혁 정책은 필연적으로 그 한계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개혁은 조금이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세운답시고 불필요한 대토목공사였던 경복궁 중건에 나서면서 국가 재정이 그야말로 거덜이 날 지경이었다. 경복궁 중건이 대원군이 시작한 삽질의 시작이었다면, 대대적인 천주교도 박해로 서구 프랑스 함대가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는 대표적인 외부에서 온 위기였다. 그전에 굽시니스트 선생은 비엣남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군대가 사이공 부근을 집어 삼킨 썰을 잠시 다루나, 솔직히 관심 밖의 일이라 패스하도록 하자. 대원군만큼이나 삽질 전문가였던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정치에나 신경을 쓸 것이지 이집트, 멕시코, 베트남 등에 개입하면서 밑지는 식민지 개발 장사로 국가재정을 신속하게 말아 드셨다. 멕시코 원정에서는 자그마치 3억 프랑에 가까운 전비를 들였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군해야 했다.

 

병인양요도 마찬가지였다. 7척의 함대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은 머스킷 스타일의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에게 미니에탄이라는 신병기의 매운 맛을 선사한다. 병기와 기술에서 200년이나 뒤지는 조선군이 무슨 수로 프랑스군을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대 프랑스 양이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베이징에 파견한 오경석으로부터 프랑스 함대가 장기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보고서를 받은 대원군은 그저 존버 정신으로 버틸 것을 주문한다. 결국 대원군이 예상한 대로, 별 소득도 없이 보급과 지원을 기약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강화성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들을 챙겨서 철군했다.

 

이전에 대동강에 출현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꼴랑 무장상선 하나 상대하는 데도 평양성이 모두 동원되어서야 간신히 제압할 수가 있었다. 평양 감사 박규수가 임지에 도착한 지 석달만에 벌어진 이 사건에서도 조선군은 순전히 운빨로 해적에 가까운 무장상선의 난동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그리고 신미양요로 이어지는 양이전쟁에서 조선은 배운 게 전혀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였다. 이웃 일본의 번들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이래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힘을 깨닫고, 그들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데 힘을 썼다. 결국 대원군을 필두로 한 지도층의 무능과 무대책이 이후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의 단초가 된 것이다.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압에 국가가 총력을 들인 태평천국전쟁을 마무리한 뒤에도 사방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다시 한 번 증국번, 이홍장 그리고 좌종당 한인관료 트리오가 출동해서 소방수로 각지에 투입해서 급한 불을 끄는데 성공한다. 특히 증국번에 이어 두각을 드러낸 이홍장이 이끄는 회군은 1868628일 가오탕 부근에서 염군의 잔당을 소탕하고 토벌을 완수했다. 한편, 청나라 조정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한편,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서양 업무를 배우겠다는 양무운동도 관 주도로 활발하게 전개된다. 문제는 양무운동의 방향성이 오로지 선진 서양의 기술의 전수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에 입각한 동도서기론으로는 서양 문물 도입에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쇄국정책을 전개하며, 개항과 교역을 거부하는 조선만큼이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물론 중국의 경우에는 두 번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의 매운맛을 단단하게 본 결과, 앞선 서구의 문물을 받아 들여 개혁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동북아시아 3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반강제로 근대화 과정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역사만으로 예의 과정이 추동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굽시니스트 작가는 당시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맛보기식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정복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7주전쟁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의 후발주자였던 프로이센이 혁신적인 방법과 전략으로 소독일주의를 주장하는 대국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새로 개발된 후장식 드라이제 소총으로 전장식 소총을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파한 것은 국민개병제로 무장한 프로이센 전술의 승리였다. 전쟁으로 북독일연방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배제시키면서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는 지도부는 통일독일의 주춧돌을 세우는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볼 때, 동양삼국에서 형태를 달리하면서 전개된 양이전쟁은 어쩌면 근대화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해 가늠조차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어느 자주국가가 외세의 간섭을 환영한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이 서구 열강들과 맺은 일단의 조약들은 모두 자국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불평등조약이었다.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과 교역 상의 불이익으로 해당국의 민중들은 부당한 행위를 통해 이윤을 약탈해 가는 외세를 배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민주공화국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군주국가에서 외세에 대항할 이데올로기로 존왕양이론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적인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다.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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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1-01-14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난거는 다 ~ 읽으시네예..부럽심다^^

레삭매냐 2021-01-14 13:12   좋아요 2 | URL
북프리쿠키님도 도서관 이용해 보셔요.

전 이 시리즈는 죄다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보았답니다 :>

붕붕툐툐 2021-01-14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흘이나 지나 리뷰를 쓰시려고 다시 책을 뒤적이시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ㅋㅋ

레삭매냐 2021-01-14 16:47   좋아요 2 | URL
왠지 책 읽고 나서 허접하나마 조금이라도
리뷰를 쓰지 않으면... 숙제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

스캔으로 한 권을 다시 본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