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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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의 책을 하나 읽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그의 책들을 사 모았지만 읽다 말다 그리고 실패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원서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무한한 재미>도 샀다. 물론 읽지는 않고 잘 보관만 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국내에서 <무한한 재미>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 브랜던 친구의 말마따나 글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모두가 읽지 않은 그런 책이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에는 모두 다섯 편의 에세이들이 실려 있다. 순서를 좀 뒤바꿔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책의 두 번째 꼭지에 해당하는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장을 찾은 월리스가 <프리미어>에 기고한 글을 읽는다.

 

고백하건대 보다 원활한 글의 이해를 위해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구해서 영화로 봤다. 오 마이 갓! 그야말로 크리피한 작가주의 정신이 배어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내친 김에 <이레이저헤드>도 구했지만 도저히 볼 자신이 나지 않더라. 아마 오래 전에 <로스트 하이웨이>는 시사회로 본 것 같은데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다시 영화를 봐야했다.

 

미국의 저주 받은 감독이라는 린치는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영화라는 <블루 벨벳>TV시리즈 <트윅 픽스>의 연출자였다. 월리스에 따르면 그의 작품들은 상업영화과 예술영화의 그 어딘가에 서 있다고 했던가. 영화표를 사고 극장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감독과 영화판 사람들이 제공하는 판타지에 대한 작가의 분석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글로 표현하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말이다.

 

항상 선량한 이미지만 연기하던 빌 풀먼의 연기 변신도 특이하게 다가왔다. 다이어트와 감독의 연출 역량 때문일까. 그냥저냥의 연기력을 구사하는 퍼트리샤 아케트는 묘하긴 하지만 에로틱한 장면들에서는 너무나 무감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해서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전개되는 설정과 서사가 기괴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한 때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기대주였던 린치가 이번에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블록버스터 <>의 대대적인 실패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했던가. 그 경험에서 린치가 느낀 건, 영화에 대한 최종편집권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고. 그래서 결국 영화는 죽도 밥도 아닌, 할리우드 대망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월리스 작가가 <로스트 하이웨이> 현장에서 나무에 소변을 누는 린치를 목격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작가론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영화 생태계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넘어 영화에 출연하는 이들에 대한 냉철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듯한 작법에 그만 매료되어 버렸다.

 

하긴 이번 에세이집의 정수는 <로스트 하이웨이> 분석도 분석이지만, 일리노이 여름축제를 방문한 동부 여피의 체험기가 아닌가 싶다. 그의 유머가 그야말로 곳곳에서 폭발한다. 우선 가축 사육인들과 농부들이 애써 기른 돼지들의 동물권을 같이 방문한 토박이 친구들과 열렬하게 주창하면서도 어제 먹은 베이컨과 곧 먹게 될 콘도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은 절대 탈 일이 없다고 하지만, 지퍼킹 인지 뭔지 하는 빈사 체험 기구에 거리낌 없이 올라탄 토박이 친구의 용맹과 패기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토박이 친구는 신나게 자신만의 재미를 추구하지만, 빈사 체험 놀이기구 업자는 업자대로 친구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펄럭이는 치마를 감상하는 장면에서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이게 바로 점잖은 양성평등교육을 받은 동부 신사와 중서부에서 자란 이들의 결정적 차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정성스레 기른 자신들의 가축들을 맥도널드나 버거킹 같은 프랜차이즈 업체에 넘기기 위해 각종 선발대회에 참가하는 가축업자들의 처지도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카니발 일꾼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역설을 월리스는 포착해낸다. 나도 반해 버렸던 퍼널케이크의 그 기름이 좔좔 흐르는 맛이란! 일리노이 여름 페스티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제인지 그는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각종 먹거리 부스와 빈사 체험 기구 같이 축제를 찾은 이들의 지갑을 터는 동시에, 이런 경험을 같이 공유한 우리는 하나다 뭐 그런 게 아니었나 어쩌나. 동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피 친구가 무려 40달러나 주고 빈사를 체험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장면에 대한 묘사는 월리스 유머가 폭발하는 지점 중의 하나다.

 

업다이크 소설에 대한 비평은 솔직히 내가 그의 토끼 시리즈를 만나 보지 못해 특별하게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학 천재들에 대한 소설도 마찬가지. 다만, 월리스가 정말 다양한 방면에 특출난 소실이 있다는 건 잘 알겠더라. 그래서 그렇게 독자들이 예상보다 우리 곁을 일찍 떠난 작가를 애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방명을 날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무명으로 남겠다는 수학자의 말이 던지는 화두는 참...

 

미국 최고의 에세이집 편집자로 나선 월리스가 독자에게 던지는 21세기 문학론은 문학 애호가라면 한 번은 꼭 읽어봐야할 그런 명문이다. 먼저 우리는 결정자(decider)인가. 미국의 곳곳에서 발표된 104편의 잘 쓰인 글 중에서 또 특출한 작품을 발굴해내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었던가. 일단 하청에 이은 재하청업자라고 월리스는 자신을 소개한다.

 

픽션과 논픽션 모두 심연과 소음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 구분조차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던가. 글쓰기란 모름지기 픽션이고 논픽션이건 간에 어려운 법이다. 특히 논픽션 에세이의 경우에는 그가 서문에 쓴 것처럼 다량의 정보, 서사, 해석과 맥락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소음(Total noise)이라는 미국 문화의 본질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고나 할까. 과연 내가 제대로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마음 대로의 오독 또한 독서의 한 가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역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과문한 독자다운 핑계가 아닐 수 없다.

 

재하청업자 편집자는 우선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걸맞지 않은 회고록을 죄다 발라내 버렸다. 그리고 편파성에 대해서도. 아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더라. 기본적으로 언론사가 영리업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주문했던가. 문학의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형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도덕적 가치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그럼 재미는 어쩌구?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런 완벽함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그런 숭고한 문학의 본보기를 추구하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뭐 그의 주장이 아닐까 싶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을 비빔밥으로 만든 나의 미천한 사유가 도달한 어느 지점일 것이다. 신나게 내달렸더니만 진이 다 빠진 느낌이다.

 

월리스 작가의 책을 마침내 읽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집에 쟁여둔 다른 책들도 한 개씩 읽어봐야지 싶다. 물론 그전에 지난주에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책부터 읽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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