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땅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존 맥스웰 쿳시의 책을 오늘 새벽에 다 읽은 <어둠의 땅>까지 해서 모두 12권이나 읽었는데도 아직 더 읽을 책이 4권이나 더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다작가라는 거겠지. 지난 십년 동안 12권의 쿳시 책을 읽었는데 올해만 6권을 읽었다. 이언 매큐언처럼 전작읽기에 도전 중이다. 그리고 보니 로맹 가리도 있었네.

 

1974년 소설가서로 존 쿳시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데뷔작 <어둠의 땅>으로. 지난봄에 읽다가 접었었는데, 지난 주말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다 말고 책장 정리 중에 발견해서 우선 이 책부터 읽자는 마음이 아마 발동하지 않았나 싶다.

 

미니멀리즘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쿳시의 책처럼 200쪽 남짓한 분량이라 주말에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어둠의 땅>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유진 돈이라는 <베트남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베트남전 심리전에 투입된 미국인 유진 돈이 서서히 정신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베트남 프로젝트>이고, 후자는 1760년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 탐험에 나선 <야코부스 쿳시의 이야기>.

 

유진 돈은 신화서술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발표되던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전에 대한 심리전에 투입된 정부 요원이다. 런던에 살던 시절, 이 소설을 구상했다는 쿳시는 196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로 이주한 뒤, 소설을 위한 자료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디엔비엔푸에서 패퇴한 프랑스를 대신해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베트남 민중과의 전쟁에 막대한 전비와 물자 그리고 인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한 때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했던 미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B-52 전략폭격기에서 떨어뜨리는 네이팜탄으로 베트남 민중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미국은 좀 더 비용이 덜 들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심리전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압도적인 무력을 제압하는 것은 하책이다. 대신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을 통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 오는 것이야말로 고대 중국의 손자가 자신의 병법에서 일찍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베트남에서 진행되는 현실을 직시한 유진 돈의 정신세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내 매럴린이 불륜을 피우는 걸 기대하며, 자신의 아내가 여전히 타인에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유진. 직장 상사 쿳시와의 불화도 그의 정신세계가 피폐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유진 돈이 베트남에 전력을 다했던 것은 불필요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싸움과 반란이 끝나면, 우리(?)는 미국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망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일까. 적의 본질을 연구하던 유진은 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건가. 베트남 민중이 원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걸 미국은 과연 몰랐던 걸까. 결국 망상에 사로잡힌 유진은 아들 마틴을 볼모로 데리고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야코부스 쿳시의 나마콰 원정기는 좀 더 흥미롭다. 부유한 농장주 야코부스 쿳시는 케이프 총독의 허가를 받아 어느 백인도 탐험에 나서지 않았던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코끼리 사냥을 원한 원정대를 조직한다. 6명의 호텐토트 원주민들을 하인으로 삼아 야심찬 원정대를 발족시킨 야코부스 쿳시는 초반부터 호텐토트 원주민들의 내분으로 골치를 썩어야했다. , 그전에 초원의 부시먼을 상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전형적인 서구인의 시선으로 본 제국주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백인들이 건설한 농장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생계의 위협을 받은 부시먼들이 농장의 경계를 침범하면서 촉발된 갈등은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부시먼들은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과 독화살로 백인들의 가축을 공격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백인들은 말과 총으로 대변되는 기동력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부시먼들에게 대응한다.

 

다시 나마콰 원정대 이야기로 돌아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간난신고 끝에 나마콰 부족을 만난 야코부스 일행은 소를 탄 추장에게 자신들은 단지 코끼리 사냥과 (상대적으로 백인들에게 유리한) 물물교환을 원할 뿐이라며 나마콰 족들을 현혹시킨다. 추장의 허락 아래, 나마콰 마을에 체류하게 된 야코부스 쿳시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그동안 그의 명령에 복속해 오던 호텐토트 하인들이 반항하기 시작한다.

 

아이들과의 장난에서 비롯된 오해로 시작된 폭력 사태로 그야말로 흠씬 두들겨 맞은 야코부스 쿳시는 유일하게 자신을 따르는 하인 얀 클라버와 함께 원시적인 장비를 갖추고 500KM에 달하는 귀환길에 오른다. 도중에 클라버를 잃고 홀로 자신의 농장에 돌아오는데 성공한 야코부스 쿳시는 1년 뒤, 보복을 위한 원정대를 조직해서 유혈이 낭자한 학살극을 감행한다.

 

소설가로서 첫 출발을 시작한 쿳시가 왜 서로 다른 시간대의 상이한 이야기 둘을 가지고 <어둠의 땅>을 기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베트남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당시 현재진행형이었던 불의한 베트남전에 대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던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쿳시는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반전 시위에 나섰던 경력으로 영주권 신청이 각하되어 고국 남아프리카로 돌아와야 했다. 어쩌면 그런 실패가 훗날 작가로서 성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작가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스토리는 갖추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18세기 서구 열강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침탈이 본격화되었을 시기, 야코부스 쿠시가 단행한 그레이트 나마콰 원정의 목적은 상아 획득이었다. 원주민들에게는 담배와 브랜디 혹은 다른 허접쓰레기를 제공하고, 그들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호텐토트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그들의 자원을 착취했다. 초원에서 평화롭게 살던 부시먼과 나마콰족의 세계에 침투해서, 아이들의 장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컷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극을 자행하는 모습에서 과연 그것이 베트남전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지 작가는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폭력적 방식의 침탈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반복된다는 걸 쿳시는 자신의 데뷔작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나의 쿳시와의 열두 번 째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청년 시절>,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동물로 산다는 것> 그리고 <디어폴, 디어존>만 읽으면 나의 쿳시 전작읽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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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8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쿳시 12권....아!!! 할말을 잃고 갑니다....ㅋ

레삭매냐 2019-11-18 13:18   좋아요 1 | URL
올해 안으로 모두 읽었으면 싶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네요.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말이죠.

cyrus 2019-11-18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 중순에 토니 모리슨 전작 읽기를 도전했어요. 그런데 지난달에는 레삭매냐님 서재에 한트케 전작 읽기를 도전해보겠다는 식으로 제가 댓글을 남긴 것 같은데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99%네요... ㅎㅎㅎㅎ 일단 토니 모리슨의 첫 번째 소설은 읽었고요, 이제 <술라>를 읽을 차례입니다. ^^

레삭매냐 2019-11-19 11:06   좋아요 0 | URL
오호라 그러시군요.

전 <술라>로 가장 먼저 토니 모리슨
작가를 만나지 않았나 싶네요.

<재즈>는 읽다 잠시 접어 두었는데
장난 아니더군요...

<빌러비드>는 리커버 버전으로 샀
는데 언제 읽게 될 지 모르겠네요.

목나무 2019-11-19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레삭매냐님 엄지척!!! 입니다.
우찌 이렇게 끈기있게 읽어내시는지.,
올 한해 마무리로 존 쿳시 전작 기대해볼게요. ^^

레삭매냐 2019-11-19 17:13   좋아요 0 | URL
문제는 쿳시의 책 두 권이 모두
절판 상태라는 점이랍니다.

게다가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있지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올해 안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coolcat329 2019-11-19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이 필요 없습니다. 레삭님의 열정독서는 늘 즐겁게 지켜보고 있네요.

레삭매냐 2019-11-19 17:58   좋아요 0 | URL
무슨 말쌈을요... 마구잡이 근본 없는 독서의 신봉자인 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