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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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정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다만 드러나지 않게 위해 모두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

 

내가 만난 실비 제르맹의 세 번째 소설은 <숨겨진 삶>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조금 읽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읽은 다음에, <숨겨진 삶>을 읽고 싶었지만 새 책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던 모양이다. 1/3 지점을 넘긴 지점에서 <숨겨진 삶>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숨겨진 삶>에서 왠지 모르게 <프라하>에서 울고 다닌다는 여자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중심에는 우르푀빌의 베랭스 군단이 자리 잡고 있다. 집안의 가장이자 독재자 샤를람이 일으킨 집안은 아들 대인 조르주가 급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한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열일곱 살에 결혼해서 네 아이를 가진 사빈은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키우고 또 씩씩하게 사업도 이끌어 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사빈이 프라하 여인처럼 심정정적으로 울고 다니다가만난 사람이 바로 어릿광대 피에르 제브뢰즈였다.

개인적으로 베랭스 군단에 얽힌 비밀이 이 소설의 중심이 아니라 피에르 집안의 숨겨진 삶이 소설의 정수가 아닐까 추론해 본다. 그냥 내 생각이다. 조르주와 쉿 왕고모 에디트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비밀, 조르주가 당첨된 복권 때문에 사빈과 싸우고 홧김에 차를 몰고 나갔다가 그만 나무와 충돌하는 바람에 객사한 이야기. 그 차 안에 막내딸 마리가 타고 있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던 이야기 등등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일 없다는 말처럼 그런 사건 사고들이 끝없이 피고 진다.

 

그런데 사빈이 길거리에서 픽업한 피에르가 베랭스 군단에 샤를람의 주장처럼 밀렵꾼처럼 잠입하면서 역설적으로 베랭스 군단은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노인네 샤를람은 피에르가 자신의 죽은 아들 조르주를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대신하지 않을까 끝없이 경계한다. 그리고 손자들인 앙리와 쌍둥이 형제 엑토르와 르네 그리고 마리에게 그를 조심하라는 말을 전달하고 주입한다. 어떤 작전은 먹혀들었고, 별무소용이거나 혹은 마리에게처럼 참담한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지.

 

실비 제르맹의 다른 소설처럼 역사적 사건들이 특별나게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프랑스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샤독 시리즈가 주는 감흥은 한 개도 없었다. 요즘 시대의 마블 같은 영향력을 지녔던 것일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해외 문학이 가지는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68혁명, 알제리전쟁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등에 대한 언급이 등장할 때마다 독자는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베랭스 군단의 일가를 위해 야회를 준비한 날, 샤를람의 모욕과 사빈-마리 모녀의 2연타에 충격을 먹은 피에르는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만다. 숲 속에 옷도 남겨둔 채. 실종신고도 소용없이 그렇게 밀렵꾼은 베랭스 군단의 기억에서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피에르 없이도 베랭스들은 다들 커서 삶에서 자기 몫을 충실하게 해낸다. 유년 시절 조에라는 상상의 친구와 어울리던 마리에게 피에르는 자신만의 가상친구 젤리를 소개하기도 한다. 후반에 등장하는 피에르의 이야기 속에서 젤리가 실존했던 사람이라는 아는 순간, 약간의 전율이 일기도 했다. 마리는 피에르가 남긴 노트에서 영감을 얻은 젤리에 대한 이야기를 성년이 되어 세상에 내보내고 동화 그림 작가로 성공한다. 청소년 시절,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마리가 쏟아내는 분노와 좌절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자자, 이제 진짜가 등장할 차례다. 정신병원에서 소 예수로 거듭난 피에르의 과거가 등장할 차례다. 아니 왜 이렇게 기대가 되는 거지. 그렇다면 독자는 태생적으로 타인의 비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까. 피에르의 엄마 셀레스트 베르강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파콤과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가 피에르였다. 전중에 독일 병사 요한 뵘란트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낳았으니 바로 그녀가 젤리였다. 전쟁이 끝나고 그동안 소극적으로 나치 치하에서 조용하게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 돌변해서 어느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레지스탕스 행세를 하며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조국의 수치를 안겨준 여인네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인 아이를 품고 삭발당하고 옷이 찢긴 채, 거리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여인이 바로 광대 피에르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실비 제르맹이 묘사하는 장면을 내 기억 속에 있는 사진에 매치시키면서 그저 할 말을 잃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역사는 폭력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필두로 해서,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보불전쟁, 파리 코뮌, 두 번의 세계대전,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식민지 전쟁 그리고 68혁명까지 역사의 모든 순간에서 폭력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샤를람과 피에르 그리고 심지어 앙리는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비는 (폭력의 현장을 카메라 앵글에 담는) 사진작가가 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결국 베랭스 군단의 명실상부한 안주인으로 격상한 루마는 돌아온 탕자피에르에게 돌아온 유령 혹은 망령에게 자리는 없다며 매몰차게 내쫓는다. 삶에서 숱하게 그런 거절을 당해온 피에르에게 한 때 동지였던 루마의 거절이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제 자기 것이 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미 구원 받은 피에르에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의 비밀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것들은 차라리 모르고 그냥 넘어 가는 게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느 나이 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시간을 흘러 보내보니 그렇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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