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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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코맥 매카시의 어느 책을 보고 기겁해서 다시는 그의 책을 보지 않겠다 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로드>도 읽어 보았지만 그렇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고 나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현대판 서부 스릴러는 나로 하여금 그의 전작들을 검토해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다음 선택은 1985년에 발표된 그의 다섯 번째 소설 <핏빛 자오선>이었다.

 

어려서 서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돌아온 튜니티를 좋아했고, 장고가 판초 사이로 악당들을 쏘아 대는 권총의 향연에 환호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그렇게 영화에서 보여 주듯이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리고 소설 <핏빛 자오선>에서 매카시 작가는 그런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핏빛 자오선>은 존 조엘 글랜턴 갱이라는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 이끌던 폭력 집단에 대한 소설적 고찰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소설은 서부 개척 연대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게 나의 추정이다. 내러티브 픽션이 레전드가 되어 가는 과정에 나도 동참한 건지도 모르겠다.

 

리뷰의 타이틀을 서부개척사로 뽑긴 했지만, <핏빛 자오선>에는 서부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심 마디로 말해서 서부개척이라는 미국의 신화를 저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양의 어느 독자는 독후감으로, 그리고 원저자는 내러티브로 비슷한 의제에 도전한다.

 

동부에서 시작된 미국 건국의 역사는 점차 서부로 뻗쳐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서부에 어마어마한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유럽에서 이주한 동부의 고착된 계급 사회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린 서부로의 이주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길에서 죽어나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디언들의 공격이었다. 언제나처럼 백인들은 외부의 공격을 환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 글랜턴 갱들이 등장할 차례다.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 혹은 유격대 같은 수준의 소규모 무장폭력집단은 멕시코 주지자의 의뢰를 받아 멕시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파치 인디언 사냥에 나선다. 문제는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아파치 인디언뿐만 아니라, 자기 동료 혹은 멕시코 사람들의 머리가죽마저 벗겼다는 점이다. 아니 머리가죽은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죽이고 한 만행이 아니냐고?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캘프헌터(scalp-hunter)들에게 머리가죽은 영수증일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주인공 소년(the kid)에 대한 소개를 잊었다. 미국 어디선가 천애고아가 된 소년은 아무렇게나 굴러먹다가 글랜턴 갱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사막을 헤매다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또 체포되어 교도소 신세도 졌다가, 실크해트와 연미복 심지어 면사포까지 뒤집어 쓴 코만치 인디언 전사들의 공격(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였다)에 포위되었다가 사지에서 벗어나는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서부개척사 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쨌든 글랜턴 갱들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폭력과 약탈의 연대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 땐 그랬지.

 

글랜턴보다도 더 소설에서 중요하게 묘사되는 인물은 바로 판사 홀든이다. 그가 정말 판사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글랜턴 갱의 실질적인 리더는 글랜턴이 아니라 판사가 아니었을까. 다양한 방면에 박식한 판사의 말에 갱들은 순한 양처럼 머리를 조아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판사의 행동이 지식인다운 건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집단에서 가장 악랄한 악당이야말로 판사가 아니었을까. 화약이 떨어진 채 인디언들에게 추적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갱들을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화약을 만들어 반격에 나서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연스레 소년과 판사가 대결하는 구도로 흘러간다.

 

판사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폭력과 약탈에 참가한 갱들에게 모든 것은 그저 두둑한 판돈을 건 게임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판돈으로 건 것은 바로 그들의 목숨이었고, 대가는 한 줌의 머리가죽 영수증을 넘긴 대가로 돌아온 금화였다. 과연 그만한 대가가 따랐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도대체 그들이 원했던 건 무엇일까? 판사가 주장하는 게임 이론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편, 글랜턴 갱의 전투 실력은 멕시코 정규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소수의 평화롭게 사는 인디언들이나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껏 용병들을 고용해서 약자를 보호하라고 주문했더니, 반대로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되어 주정부의 금품을 갈취하는 깡패로 변신한 모습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에 등장하는 폭력과 약탈로 얼룩진 서부개척에 대한 소설적 접근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국가라는 피상적 존재가 하지 못하는 일을, 일개 문학가가 나서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진실을 밝히는 여정에 도전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멀리 했던 코맥 매카시의 작품들, 특히 국경 3부작을 만나볼 시간이 이제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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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0-1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카시하고는 영 궁합이 맞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제 감상과 별개로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10-17 21: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근 십 년을 멀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의 매카시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세 권이 올해 읽은
책이네요.

단발머리 2019-10-1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맥 매카시 왕팬과 같이 사는 1인입니다.
제게 자꾸 매카시를 권해서 난감한 차에, 레삭매냐님 글 읽고 나니 함 도전해볼까, 건설적인(?)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처럼,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10-18 08:12   좋아요 0 | URL
응원하는 바입니다 -

모든 책에는 시절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제가 다시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

카알벨루치 2019-10-1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이름, “장고”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10-18 09:44   좋아요 1 | URL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죠 ~

요즘 서부영화는 그런 재미가 없더라구요.

뒷북소녀 2019-10-1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미친듯이 읽고 떨어져 나왔는데(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알라딘에 내다팔지는 않고 소장하고 있어서, 저도 언젠가는 다시 들춰보겠죠.

레삭매냐 2019-10-19 21:05   좋아요 0 | URL
저는 매카시 늦바람이 들어서 이제
읽기 시작했네요.

소장각 !!! 묘한 재미가 있어서 일단
컬렉션에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