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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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15일은 일본 패전 74주년이었다. 자신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거부하고 있는 전범국가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새로운 동아시아 패권을 위한 경제전쟁을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는 기존의 1965년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통사적으로 다룬, 1970년에 발표되어 이듬해 미국 퓰리처상에 빛나는 존 톨랜드의 대작 <일본 제국 패망사>(원제는 떠오르는 태양”)의 출간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전쟁국가의 망상을 저버리지 못하는 아베 정권의 기원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톨랜드의 논픽션은 정확하게 짚어낸다.

 

톨랜드 저자는 1936225게코쿠조라고 명명한 장에서 일왕(천황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고 싶지 않다) 지지한다는 일단의 젊은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으로부터 태평양전쟁의 기원을 추적한다. 사실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이라는 이름으로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 출신 이시하라 간지의 주도 아래 진행 중이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이래, 일본은 탈아입구라는 구호 아래 근대화를 추진했다. 메이지 유신은 부국강병이라는 기치로 군국주의 일본의 탄생을 예고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연합한 삿초동맹으로 토막에 성공한 근대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연이은 승리로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러시아와의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 이라 옥키덴트에 눌린 오리엔트의 기념비적인 승리로 꼽을 만했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가 레벤스라움이라는 이름으로 동방 진출을 도모해서 슬라브 민족의 노예화 그리고 러시아 정복이라는 대망을 꿈꾸었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의 꿈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 진출이라는 센고쿠 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황도파 청년들은 이미 일본 정국을 장악한 군부의 실세들이 좀 더 강력한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서 쿠데타를 기획했다. 군부의 일부 세력들은 그들의 대의에 동의하기도 했지만, 대세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황도파의 쿠데타 당시, 3, 5대 조선 총독을 지낸 총리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청년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보다 강력한 군국화를 주장하는 황도파들을 제압하고 간신히 사태를 수습했지만 1년 뒤, 중국의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 초반의 형세처럼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난징과 상하이 같은 대도시들을 잇달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지구전에 돌입한다. 이른바 용과 사무라이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일본의 패전은 확정된 게 아니었을까.

 

대전쟁(1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의 뒤를 이어 세계제국으로 태평양 경쟁에 뛰어든 미국은 자신들의 미래 시장으로 점찍은 중국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전략적으로 원하지 않았다. 일본의 명분 없는 전쟁을 비난하면서 비밀리에 장제스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부대가 블리츠크리크로 폴란드 전역을 석권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구데리안과 로멜이 이끄는 독일 기갑부대가 프랑스를 패배시키자, 일본은 재빠르게 힘없는 프랑스 비시 정부의 인도차이나 식민지들을 접수했다. , 과연 미국은 그런 일본의 팽창주의를 허용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때 일본의 후원자였던 미국은 경쟁자를 넘어 가상의 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운명의 1941622, 독일은 마침내 불가침조약을 맺은 러시아를 침공한다. 파죽지세로 서부 러시아를 휩쓴 독일 전쟁기계의 빼어난 활약에 고무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연전에 맺은 삼국동맹에서 자신들만 소외되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지미파들은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잘 알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가능하면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착된 중국전선 상황을 타파하고 싶었던 일본 육군 지도자들은 미국 정부의 가혹한 평화협상 조건에 경악한 나머지 물불 가리지 않고 개전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 조치, 전략물자 수출 제한 그리고 막판의 석유 금수조치가 최후의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톨랜드에 따르면 일본 군부는 미국 정부에 상당한 양보를 할 의향이 있었지만, 중국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편으로는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이미 일본군의 암호를 대부분 해독하고 있었던 미국 지도자들은 일본의 이런 이중적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개전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다만 언제 그리고 어디냐는 문제만 남았다.

 

사실 개전까지 상당한 부분을 톨랜드 저자는 할양하고 있는데, 일본 제국의 흥망사에서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쟁 자체에 관심 있는 나같은 독자가 아니라면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다만, 훗날 미해군의 주축이 되는 항공모함을 격침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흠이긴 했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과 나구모 강습부대가 이룬 전과로 미 태평양함대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고, 일본은 그동안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이 원하던 침략전쟁을 수행할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의 주공은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자바 공략, 혼마 마사하루의 필리핀 진공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진격이었다. 사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상대한 적군은 식민지 질서유지를 위한 2선 부대가 전부였다. 영국은 본토 방위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동양의 진주라 불린 요새이자 전략 거점인 싱가포르를 방위할 여력이 조금도 없었다. 대영제국에게 싱가포르 함락은 어쩌면 또 다른 제국의 몰락을 상징했는지도 모르겠다. 필리핀 총독이었던 맥아더는 꼴사납게 자신의 책임을 다른 웨인라이트에게 떠넘기고 호주로 도주해 버렸다. 아무리 봐도 맥아더의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실제와 너무 다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지휘관이었던 혼마 장군이 바탄의 죽음의 행진 때문에 전후 교수형을 당한 장면은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전범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초반에 일본에게 한 방 먹은 미국은 손 놓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둘리틀 특공대를 조직해서 도쿄 공습에 나선다. 개전 이래 연전연승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미국의 복수전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자신감에 고취된 일본 해군은 이번에는 거의 도박에 가까운 작전에 나서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태평양전쟁의 변곡점이 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역사가 언제나 그렇듯, 간발의 차이로 엇갈린 행운의 여신이 보낸 우연 그리고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판단한 미군 정보부대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다음 목적지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군은 194264일부터 7일까지 나흘간 벌어진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해군에게 항공모함 아카기, 히류, 소류 그리고 카가 4척 격침이라는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미 해군을 미드웨이로 유인해서 격멸하겠다는 야마모토 사령관의 작전은 실패하고, 역으로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기도부타이휘하 항공모함들을 적에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더 치명적인 사실은 진주만 기습을 경험한 유능하고 숙련된 함재기 조종사들을 잃었다는 점이다. 함재기와 조종사의 손실, 모두 일본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피해였다.

 

미드웨이 해전이 바다 전쟁의 승부령이었다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전투는 육지에서의 기점이었다. 일본 대본영에서도 역시나 승세를 잡은 미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그들이 생각한 최남단의 과달카날(일본명 가다루카나루)에서부터 시작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과달카날 전투는 194287일 시작되었고, 6만에 달하는 미군 병사들이 전선에 투입되었고, 31,000명의 일본군 중에 2만 명이 죽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처음부터 미해병대에게 빼앗긴 헨더슨 비행장을 되찾기 위해 대단위 부대를 투입해서 초전에 승부를 걸었어야 했는데, 미군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소규모 부대를 투입해서 소모시켜 버렸다. 그동안 미군은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하고 산더미 같은 보급물자로 일본군을 압도했다. 결국 그들은 중기관총 같은 화기로 무장한 미군 진지로 야간에 훗날 반자이 돌격으로 알려진 무모한 진격을 시도하다 결국 일패도지해 버렸다. 중국 전선에서 작전의 신으로 칭송받은 쓰지 마사노부 중좌가 작전에 참가해서 연속된 오판으로 1만 명의 장병의 목숨을 헛되게 만들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을 괴롭힌 적은 미군뿐만이 아니었다. 말라리아와 부족한 보급 물자로 일본군은 녹색 지옥에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미군의 포탄과 총탄 뿐 아니라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보급 문제는 태평양전쟁의 모든 전선에서 고질적 문제였다. 일본군의 주식은 밥이었는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곳으로 미군의 포화가 작렬했으니 말이다.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작전 참모들은 그놈의 세이신(정신) 타령을 했지만, 맨손과 허약한 육신으로 잘 쉬고 잘 먹은 미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과달카날 3차전에서는 만주에 주둔 중이던 관동군 정예 2사단까지 동원했지만 패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더 슬롯으로 알려진 수송로에서 미해군에게 격침당하는 수송선의 피해도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승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속히 손절하고 퇴각해야 했지만, 도쿄의 대본영은 패전 사실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것에만 연연했다. 망하는 조직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한편, 미군 역시 일본의 해군과 육군처럼 전쟁의 향방을 정하는데 있어 이견을 보였다. 맥아더로 대표되는 미육군은 방어가 두터운 뉴브리턴의 라바울을 건너뛰고 뉴기니를 거쳐 맥아더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위해 필리핀 진공을 주창했다. 대신 해군은 개구리 뜀뛰기 전법(leapfrog)이라 명명된 작전으로 솔로몬 제도를 제압하고 마셜 제도, 길버트 제도 그리고 마리아나 제도를 거쳐 타이완으로 가는 주공을 원했다. 1942년 미영소 연합군은 북아프리카 상륙작전, 엘알라메인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유럽 대륙에서 제2전선을 열어 소련에 대한 독일의 압박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태평양전쟁을 도맡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맥아더의 공력 루트보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공력 루트가 훨씬 더 합리적이고 적은 피해로 일본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뉴조지아 그리고 부건빌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니미츠 부대의 다음 목적지는 길버트 제도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섬이었다. 베티오섬의 수비 사령관 시바자키 케이지 소장은 토치카와 벙커 그리고 참호로 잘 무장된 채, 미군의 상륙에 대비했고 미군 해병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항복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군은 죽는 순간까지 미군에 저항했고, 미군 지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 손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계속되는 사이판, 오키나와 그리고 이오지마 전역에서 미군은 더욱 강력한 일본군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과 미국이 맞붙은 태평양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선박이 격침되고, 숱한 함재기들이 수장됐다. 총동원 체제에 돌입한 미국의 가공할 만한 생산력을 일본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과달카날 이래 일선의 병사들에 대한 보급은 고질적 문제였다. 뉴기니 전역에서도 그리고 뒤이은 필리핀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보급할 물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군에게 모두 빼앗긴 상태에서 수송선을 띄우는 일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군부 주도 아래, 제 아무리 민간 수요를 억제하고 오로지 전쟁을 위한 생산에 박차를 가해도,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엄청난 생산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처음부터 개전에 반대했던 게 아닐까.

 

한편, 일본이 동남아시아 제국을 침략하면서 내세운 대동아경영권의 허실은 곧 드러났다. 각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일본은 해방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구미 식민제국을 대신한 새로운 지배자였을 뿐이었다. 개전의 이유가 미국의 각종 금수 조치를 타개하고, 천연자원 획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일본 제국의 본질을 깨달은 현지인들이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나마 일본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잠잠했겠지만, 각지에서 일본군이 연달아 미군에게 패배하면서 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선전한 아시아 민중에 의한 대동아경영권은 처음부터 일본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질서를 위장하기 위한 선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전쟁의 무대는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이었다. 사이판마저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제국의 심장부 도쿄까지 보잉사에서 새로 개발한 슈퍼포트리스 B-29 폭격기의 공습권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절대방어선을 주창하던 일본군의 저항이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판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겠다는 일본 대본영의 전략은 수송작전의 참담한 실패와 원래 사이판에 투입되기로 되어 있던 중국 대륙의 관동군 부대가 국민당 부대의 선전으로 중국 전선에 묶이게 되면서 빈약한 병력으로 7만 명에 달하는 미군 상륙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타라와 전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은 막강한 육해공군력을 동원해서 철저하게 일본군 진지를 포격 및 폭격해서 저항하고 저항을 누른 뒤 상륙거점에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미군을 상대로 그다지 의미 있는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옥쇄 돌격이 이어진다. 그리고 진주만 강습부대를 이끌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을 비롯한 수비대 고위 지휘관들은 자살한다. 다른 전역과 달리 사이판에는 당시 25,000명 가량의 일본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일본 정부의 미영귀축이라는 선전에 속아 집단자살이 이루어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톨랜드는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논픽션에 담아, 사실성을 극대화시켰다. 사이판 실함으로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되고, 역시 조선 총독을 지낸 군인 출신 고이소 구니아키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제 일본은 별다른 반전 역시 패전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편 육군의 대표선수 맥아더는 전략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 필리핀 공략으로 개인적 복수전에 나서게 된다. 민다나오와 레이테 그리고 루손을 해방시키겠다는 맥아더의 전략은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연합군 수뇌부가 최종 목표로 설정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대전략 차원에 판단해 볼 때, 무의미한 작전이었다. 태평양의 모든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국이 장악한 마당에, 필리핀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래 전,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고집하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낭패를 당했던 것처럼 일본의 군 지휘부 역시 비슷한 오류를 필리핀 전선에서 범했다. 그리고 자그마치 33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1944년과 1945년 필리핀 전역에서 죽었다.

 

어쨌든 필리핀을 사수하기 위해 대본영에서는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맹장 야마시타 도모유키를 필리핀 방면 사령관으로 파견한다. 총리대신 도조와의 불화로 싱가포르 함락 이후, 소련군의 남하를 대비한다는 핑계로 만주에 가 있던 야마시타 대장은 그렇게 사지로 들어갔다. 2-26사건을 일으킨 황도파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가 야마시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도조가 그를 기피한 것도 황도파 쿠데타의 주역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뒤, 야마시타는 마닐라 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교수형 당했다.

 

뒤이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1억 총옥쇄 본토결전을 주장하는 대본영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이오지마는 슈퍼포트리스 B-29의 폭격 기점으로 일본 본토 공격에 꼭 필요한 전략거점이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일본 역시 19446월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을 수비대 사령관으로 파견해서 미군의 내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달부터 이미 미군은 폭격과 함포 포격으로 침공을 준비한다. 한편, 상륙군의 교두보 확보 시점을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한 해군은 구리바야시의 상륙군을 최대한 내륙으로 유인해서 일인십살(一人十殺)하겠다는 기존의 일본군의 방어계획과 전혀 다른 전술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세 개의 비행장 수비와 바다 위에 떠 있는 미군 함정에 대한 공격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구리바야시는 함께 수비에 나서야 하는 해군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어서 타협을 하면서도 토치카와 벙커, 참호 그리고 지하 교통로를 건설해서 그야말로 이오지마를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과달카날 이래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일본군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옥쇄 돌격도 수비대 사령관은 금지했다. 1945219일부터 한 달 정도 진행된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과 미군의 사상자는 총 5만 명에 달했다.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지 미군 지휘부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막대한 사상자를 낸 미국은 결국 일본의 조기 항복을 유인하기 위해 유럽 전선을 끝낸 소련에게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과 신형 폭탄의 사용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미군 지휘부가 194511월로 예정된 규슈 상륙을 감행했을 시, 미군 피해가 백만 명에 달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에 놀란 나머지 TNT 폭탄 2만 톤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을 일본의 8번째 큰 도시이자 군항이 위치한 히로시마에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히로시마에서만 무려 2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뒤이어 당시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에도 투하했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일본 군부는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된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인데, 일왕의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단의 근위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다시 한 번 궁정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상명하복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일본 군부가 이끌었던 태평양전쟁이 하극상으로 시작해서 하극상으로 끝났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에서 아쉬운 점은 임팔 작전으로 알려진 일본군의 버마 침공 작전이 상대적으로 너무 간략하게 다뤄진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10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대륙에 묶어둔 중국 전선에 대한 부분도 태평양 전선의 기술에 비해 부족한 점도 눈에 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전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했다는 비판은 오류다. 만약 중국 대륙 전체를 일본군이 장악해서 불필요해진 병력들이 필리핀 전선이나 솔로몬 제도의 격전지에 투입되었다면 맥아더나 니미츠의 승리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의 원폭이 전쟁을 종전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일본 군부를 원폭보다 더 심하게 압박한 것은 만주 전선에서 소련군의 개입이었다는 진술도 유의미한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었다. 소련군은 딱 일주일 싸우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비롯한 숱한 전리품을 챙길 수가 있었지 않았던가. 아마 역대 전사에서 이보다 남는 장사는 없었을 것 같다.

 

오래 전 소설 <대망>으로 유명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전쟁>(5)을 읽었다. 일본 종군기자 출신 극우 인사가 쓴 거의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라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태평양전쟁 전개의 대강의 흐름과 디테일에 대해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 다시 만난 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과 달리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비교적 균형 잡힌 시선으로 일본 제국의 패망을 추적한다. 서방에서 승승장구하는 독일이 세계정복이라도 하면, 자신들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하나도 없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사로잡혔다. 그래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미국관의 전쟁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시작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모습에서 태평양전쟁의 실체가 보였다. 패전 74년이 지나 다시 평화헌법을 버리고 전쟁국가로 거듭나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군국주의의 유령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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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9-05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되게 잘 찍으셨어요. 진짜 책에서 연기나는 느낌인데요??

리뷰 잘 쓰신 거야 너무 당연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레삭매냐 2019-09-05 11:46   좋아요 0 | URL
사진은 아침에 출근 하기 전에 막찍...

워낙 책의 분량이 방대해서 잊어 버릴
까봐 계속 업데이트 하면서 리뷰를 작성
했네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19-09-05 15:27   좋아요 1 | URL
앗, 정말요! 책에서 불난 줄 알았어요.ㅋㅋㅋ
근데 전 못 읽을 것 같습니다.ㅠ

2019-09-05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9-05 13:10   좋아요 0 | URL
분량이 아주 방대합니다 ~
속으로 이거 물량작전으로 퓰리처상
을 받은 게 아니야 할 정도로 말이죠.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0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유럽/아프리카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리라는 계산도 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들이 동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중국 내륙, 남으로는 미얀마, 북으로는 만주에 걸쳐 전선을 확대시켜 고립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레삭매냐님께서 지적하신 강박관념과 오판 그리고 탐욕의 결과가 일본 군국주의자 스스로를 묶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9-09-05 13:13   좋아요 1 | URL
아주 명징한 지적이십니다 !

감당할 수도 없는 전선의 무리한 확대
가 결국 일본 패망의 원인이었다고 생
각합니다.

주변에 우호적인 나라들은 하나도 없
고 오직 적들만 쌓아 두었으니 이기
는 게 더 이상했을 것 같습니다.

초란공 2019-09-05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무모한 전투를 개인적인 복수의 기회로 삼았던 맥아더는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 같단 생각이 드네요.^^;;

레삭매냐 2019-09-05 13:26   좋아요 1 | URL
재작년엔가 내 <모비 딕>을 읽어
보겠노라고 생각하고 기세 좋게
시작은 했지만 정작 다 읽진 못했
더라는.

맥아더는 정말 문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