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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어제는 원래 휴가 다녀와서 일찍 자는 계획이었는데 그레임 맥레이 버넷의 <블러디 프로젝트> 읽다가 그만 망했다. 자기 전에 좀 읽는다는 게 그만 다 읽고 나서 새벽 2시에 잠들었다. 물론 다 읽고 나서도 <문타이거>도 좀 읽었지. 아 끝없는 나의 책사랑.
<블러드 프로젝트>는 1869년 8월 10일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컬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장르소설로 맨부커 최종심에 올랐다는 점이 아무래도 셀링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소설은 사건 발생, 주인공 로더릭 맥레이의 진술, J 브루스 톰슨의 편견에 가득한 보고서 그리고 재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맥이 빠질 진 모르지만 스포일부터 해야할 것 같다. <블러디 프로젝트>에는 기가 막힌 반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로디의 불쌍한 사연을 잘 파악한 유능한 삼류 변호사 앤드루 싱클레어의 법정에서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상에 의한 범죄라는 정상참작은 거부된다. 그렇다고 자그마치 세 명이나 되는 브로드 패밀리를 잔혹하게 살해한 로디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화끈한 법정 드라마나 반전 대신 저자는 어떻게 해서 17세 소년 로디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사건발생 1년 전 쯤, 맥레이 집안의 균형추라고 할 수 있었던 우나 맥레이가 산후합병증으로 사망한다. 로디의 아버지 존 “블랙” 맥레이의 로디에 대한 학대는 일상이 되었다. 그전에 사건을 바라보는 컬두이 주민들의 진술이 등장하는데, 로디에 대한 의견이 판이하게 나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결정적인 것은 라클런 브로드가 치안관이 되면서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던 맥레이 가족과 불화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건 발생 후, 로디는 도주도 하지 않고 순순하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겠다는 의도에서 사건을 저질렀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사건의 이면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우선 맥레이 집안의 우환이 겹치면서 어쩌면 교육을 받고 탁월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수도 있는 로디가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하일랜드 지역의 마름과 치안관을 앞세운 착취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블랙 맥레이는 대대로 소작을 부쳐 먹고 살았다. 그들에게 컬두이 외의 삶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잠시 로디는 아치볼드 로스의 말을 듣고 캐나다나 혹은 글래스고로 떠나 상인이 되어 성공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안을 건사하는 제타와 쌍둥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잠시 동안의 가출은 로디로 하여금 원인제공을 한 라클런 브로드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라클런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블랙 맥레이와 로디는 마름을 찾아가 항의해 보지만, 라클런이 치안관 행세를 하면서 모든 문제를 막아 주는 마당에 지주를 대신하는 마름이 무엇하러 일개 소작인을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바닷가의 해초마저 지주의 것이니 자신의 허락을 받고 채취해야 한다는 라클런의 완장질은 로디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누이 제타에 대한 성적 착취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것은 라클런의 딸 플로라 매켄지와의 로맨스다. 이런 장치는 참으로 정교하다. 초반에 라클런 가족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세 명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굴까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 집에 모두 다섯 명의 식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라클런은 확실하고 나머지 두 명은 누굴까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 중의 하나가 로디가 한 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플로라였다니! 아 스포일은 이제 고만 해야겠다.
사건의 배경에는 라클런에 대한 로디의 개인적 원한도 있었겠지만, 라클런의 완장질을 방치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생각한다. 라클런은 규칙을 운운하며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벌금을 컬두이 주민들에게 매겼지만, 사실 그런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맥레이 부자가 찾아간 마름은 아예 규칙에 대해 알려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규칙을 알려 주면, 나머지는 위반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해괴한 논리였다. 그래서 규칙에 대해 알려줄 수가 없다고 강변한다. 그런 식이라면 라클런의 완장질은 거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갖게 되는 게 아닌가. 치안관과 마름 그리고 지주의 이런 견고한 연합체가 지배하는 하일랜드의 실상이 드러나자 입맛이 바로 씁쓸해졌다. 뭐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법의학자로 등장하는 J 브루스 톰슨의 존재는 악역을 맡은 라클런 브로드의 그것에 견주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교도소에 갇힌 재소자들의 사정 따위는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사실과 실례만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최근 재판에 넘겨진 일단의 인사들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법기술자들이 사법농단을 통해 어떤 식으로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알량한 지식과 편견으로 무장한 톰슨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짜증이 났다. 어쩌면 그런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태도야말로 빅토리아 시대를 규정하는 시대정신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창조해낸 역사 서류를 바탕으로 이런 멋진 소설을 쓴 그레임 맥레이 버넷의 역량에 감탄했다. 재밌기도 하고, 장르소설 답게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블러디 프로젝트>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