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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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유작 <달과 불>을 읽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며칠 전에 읽은 시바타 쇼의 소설처럼 나에게는 늦게 도착한 탓인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달과 불>의 배경은 작가의 실제 고향인 피에몬테/쿠네오 지방의 산토스테파노벨보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화자는 20년 간 고향을 떠났다가 성모축제에 즈음해서 고향에 돌아온 안귈라(뱀장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벌써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의 과거 행적을 돌아볼수록 안귈라가 고향에 어떤 미련을 두었을까 싶다. 사생아로 태어난 안귈라는 어려서는 오 리라를 받으며 가난과 싸우며 이부누이들과 파드리노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좀 자라서는 모라 농장의 하인이 되어 그저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랬던 안귈라가 군입대를 시작으로 해서 인근 대도시 제노바를 거쳐 미국의 태평양 바다 끝까지 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자수성가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안귈라는 자신이 부재한 시간 동안 엄청나게 바뀐 현실을 목도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지주들은 몰락했다. 다만 종교계를 대표한 주임신부는 건재해서 파시스트 스파이로 처형된 이들의 죽음을 위로한다. 물론 그가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시인으로 출발해서 소설가, 문학비평가 그리고 공산주의 반파시스트 혁명가였던 체사레 파세베가 그리는 현대 이탈리아의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독자의 그런 기대와 달리 <달과 불>은 이탈리아의 시골마을과 미국을 부유하는 한 오디세우스의 유랑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리노, 산토스테파노벨보, 카넬리, 알레산드리아 그리고 제노바 같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르는 낯선 지명들이 주는 이물감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성공을 구가하며 떠난 미국에서 이방인이었듯이, 고향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와서는 안귈라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부재한 동안 고향을 지켰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유쾌한 음악가 그리고 목수인 누토를 통해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의 궤적을 안귈라는 추적한다. 모라 농장의 하인이던 시절, 자신의 갈라테아였던 눈부신 이레네와 실비아에 대한 회상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급한 욕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레네 자매 역시 백작 부인의 저택에 초대받지 못해 안달하는 장면에서는 욕망의 본질은 결국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시절 안귈라와 누토에게는 가미넬라 언덕이라는 공간이 그들의 전부였지만, 안귈라는 그 너머 카넬리와 제노바를 거쳐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까지 탐험하고 결국 성공해서 지주가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런 금의환향이야말로 그네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역설적으로 고향에 남아 소작을 부쳐 먹던 발리노 삶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발리노의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살아남은 절름발이 소년 친토가 상징하는 건 어쩌면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탈리아 국가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호모 폴리티쿠스 독자는 자꾸만 정치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전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나라였다. 파시스트 두체 무솔리니와 독일군에 맞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운 빨치산 그룹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장 총선을 치르면 공산당이 승리할 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빅 브라더 역할을 하던 미국이 이것을 용인할 리가 없다. 그리스에서는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탈리아를 철의 장막에 내줄 수 없었던 미국이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가톨릭을 포섭해 우익 정부의 탄생을 도왔다. 그 결과,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은 전쟁 전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모라 농장의 막내 산티나의 운명적 삶이야말로 이런 혼란이 정점에 달한 시절을 묵직하게 타격하는 결말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산티나는 이상한 놈팡이들과 꼬여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언니들과는 달리 자주적인 신여성의 모습에 도전한다. 그녀는 파시스트 본부에 일하는 동시에 빨치산에도 협력하는 이중적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산티나는 과연 부역자였을까? 아니면 명예로운 빨치산 전사였을까?

 

내가 과연 체사레 파베세의 <달과 불>을 세세하게 이해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글가는 대로 읽고 싶었는데 역시나 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의 문학적 시원을 이룬다는 시집 <피곤한 노동>이 읽고 싶어졌다. 아쉽게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그의 시집이 없더라.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방증이겠지. 언제고 헌책방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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