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오래 전에 신형철 씨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이다. 언제나 출간이 되는지 기다리다가 결국 망각해 버렸다. 그리고 작년 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 팟캐에서 들었을 때만큼 땡기지가 않아서 그냥 말았다. 아마 그 때라면 사서 읽었겠지만. 도서관에 입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게으르게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55년 만에 만나게 된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의 주인공은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후미오 군이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도쿄여대 출신의 세쓰코와 약혼하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의 삶은 지루하고 나른하게 진행된다. 불같은 사랑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의 시대처럼 들린다.
후미오가 헌책방 순례 중에 한 질의 H전집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 같은 책쟁이를 위한 책인가 싶다. 헌책방에서 나도 이미 많은 사연을 만나지 않았던가. 콜롬비아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마르케스의 책을 샀다고 했던가. 지인에게 애써 선물한 책이 헌책방을 부유하는 것도 목격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잡설이고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세쓰코를 통해 자신이 헌책방에서 산 전집의 원래 주인이 사노라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면제를 먹고 죽은 사노가 남긴 유서에 따르면 한 때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혁명을 꿈꾸던 청년은 시위 도중에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사실로 괴로워했다. 육전협의 평화주의 노선 채택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청년은 일체의 운동을 접고 기득권층이 원하는 올바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간부인 부사장의 눈에 들어 데릴사위 후보가 되기도 하고, 전도유망한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미래의 간부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본질은 ‘배신자’가 아니었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비판적으로 바라본 지점은 바로 사노의 생각이었다. 그는 너무 순수해서 세상과 타협하는 걸 몰랐던 걸까? 자신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이데올로기와 동지들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을 마냥 사노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런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방법 말이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후미오의 주변에는 그런 허무주의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다. 후미오가 아는 고지식한 미래의 교수 후보는 세쓰코를 통해 자신이 곧 결혼하게 될 여자의 뒷조사를 부탁한다. 소설이 배경이 되는 시절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같아서는 참 거지같은 발상의 소유자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게다가 그 아가씨는 자신의 지도교수님과 불륜에 빠지지 않았던가. 과연 그들의 비밀은 지켜질 것인가.
후미오 주변에는 왜 그리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심지어 세쓰코조차 지하철역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중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후미오와의 결혼을 서두르던 세쓰코는 이런저런 사실들을 알고 난 뒤 지독한 고독감에 빠지기도 하고, 결국 무사안일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시골 마을로 가 자신의 알량한 영어 지식을 바탕으로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진행에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편지들이, 그것도 속달이라는 방식으로 전달되어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낯설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메일이나 카톡 같은 메시지와는 다른 결이겠지. 젊은 날의 후미오는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라며 육체의 향연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안정을 찾아 세쓰코를 찾지 않았던가. 우리의 젊음은 모든 방종을 용인하게 만들어주는 만능 치트키 같은 것일까 과연.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기도 한다. 소멸 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심각한 고민을 해봤을까? 인생의 가장 절정기에 죽음을 두고 고민한다는 점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시바타 쇼 작가의 데뷔작 <록탈관 이야기>에 나오는 발칙한 라디오 마니아 중학생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실 왜 이 단편이 뜬금없이 등장하는가 싶었지만 작가의 시원을 밝힌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수록이지 않았나 싶다. “코리안 워”니 “레드 차이나” 같이 소년이 조립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에 먼저 눈이 간다. 왜 이 소년들은 그렇게 라디오의 세계에 열광했을까? 라디오 조립이라는 새로운 세계, 회로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신세계야말로 그들에게는 하나의 해방구로 작동한 게 아닐까.
패전 후,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기업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극적인 부활에 나서게 된다. 배터리만 하더라도, 미군들이 엄청난 재고 물량을 소진하는 전쟁특수를 맞게 된다.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나건 말건 그렇게 애타게 가지고 싶어 하던 진공관의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소년들의 마음을 산산 조각내 버린다. 아니 트랜지스터도 아닌 진공관에 대한 이야기라니 놀랍다 놀라워. 한편, 전쟁 투입을 앞둔 미군들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 몰래 빼돌린 진공관을 간다 거리의 암시장에 내놓기도 했단다. 주인공 소년은 우연히 얻어 걸린 고가의 록탈관을 200엔에 사들여 희희낙락한다. 문제는 나중에 그가 발견한 미세한 균열이었다. 그렇게 희망은 록탈관의 균열과 사라져 버리고...
아마 내가 청년이었을 때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었다면 다른 감성으로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어 만난 청춘 소설에 대한 감상은 솔직히 말해 심드렁했다. 나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