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의 파일럿
얀 지음, 박홍진 옮김,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메이저리그 야구를 좋아한다. 나에게 스포츠는 오로지 야구뿐이다. 사실 다른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은퇴했지만, 예전에 내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노마 가르시아파라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의 타격 전 세리머니는 정말 독특했다. 아마 야구 선수들처럼 미신 혹은 징크스에 시달리는 직업군의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더더욱. 그런데 이번에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읽으면서 야구 선수 못지않게 미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바로 비행기 파일럿들이었다.

 

이번에 시간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앙리와 알퐁스 카스티약 두 쌍둥이 형제가 주인공이다. 발랑틴을 사랑하는 알퐁스는 오래 전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으로 물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발랑틴의 남동생 프랑스와가 세느 강에 빠졌을 때 구하지 못했다. 대신 형 앙리가 뛰어 들어 프랑소와를 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을 때는 공중에서도 구하지 못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책을 다 읽은 나의 서술이고, 저자들이 구사하는 내러티브는 뒤죽박죽이다. 어쨌든 여자들을 꾀는데 일가견이 있는 앙리는 공중에서 그리고 역시 같은 전투기 조종사였던 알퐁스는 지상에서 전차병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그가 모는 전차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발랑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야기를 좀 복잡하게 꼬아, 여전히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하는 앙리에게 에델바이스 문양을 그려 넣은 독일군 조종사 에릭이 도전장을 내민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이 떨어지는 걸 깨달은 앙리는 첨단 기관포를 조작해서 승리를 거둔다. 다시 도전장을 던진 에델바이스 에릭을 두려워한 앙리는 쌍둥이 동생 알퐁스와 역할 바꾸기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자신이 전차병으로 그리고 알퐁스는 에델바이스를 상대하라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형제에게 무심했다. 전차를 몰던 앙리가 그만 폭발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자신의 멀쩡한 얼굴을 형처럼 만들 수 없었던 알퐁스는 형의 화실에서 오래 전 사건을 연상케 하는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초상화였다. 살벌하게 해골 위에 올라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 그녀가 바로 형제에게 예언을 한 것이었다. 형 앙리는 동생 알퐁스 행세를 하고 그녀를 취했고. 유럽 그래픽 노블, 특히 이번에 만난 로맹 위고의 그림들은 죄다 에로틱한 시퀀스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특히 어제 이발소에서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그런 장면들이 다수 등장해서 식겁했다네. 암튼 그것도 그들의 스타일이겠지 싶다.

 

뭍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형 앙리는 비행기에서 시도니라는 여성과 관계를 하던 중 독일군의 피습으로 시도니가 죽는 사고를 겪는다. 이에 형 앙리는 알퐁스에게 예전의 빚을 갚으라고 재촉한다. 그게 2년 전인 1916년의 일이었다. 아, 발부르가는 앙리에게 돌심장을 가진 여자에게 죽음을 당할 거라는 예언을 했던가. 모든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는 법이지. 나중에 에릭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발부르가는 확실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육감적인 몸매의 집시 여인은 앙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던진다. 앙리와 알퐁스의 나라 프랑스는 결국 독일에 이기지만, 끝까지 공군이길 원했던 앙리는 지상 퍼레이드 대신 비행기로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예언대로 ‘돌심장’을 지닌 여성과 충돌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브라질 출신 “표범” 후아오 가르손 이 소브라도는 황새 비행중대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으로 자원한 조종사도 그렇지만 일왕을 추앙하는 일본 출신 시게노 시요타케도 황새 비행중대의 특별한 구성원이다. 실제로 일본 출신 조종사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싸웠는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발부르가는 미국 출신 모델 케이트 업튼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뜬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어제 읽은 세 편의 로맹 위고가 그림을 맡은 그래픽 노블 중에서 <에델바이스의 파일럿>이 내러티브는 가장 강력했다. 마하의 속도를 주파하는 제트기도 아닌 복엽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마치 중세 시절 결투에 나선 기사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시절의 말이 비행기로 바뀌었고,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남성들의 전유물로 표현한 다시 말해 폭력의 순화 버전인 기사도 말이다. 백중지세로 실력보다는 운이 결투의 결과를 결정지었다는 점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국내에 나온 로맹 위고의 작품은 이제 <엔젤 윙스>를 빼고 모두 읽었다. ‘버마 밴시’라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건 아쉽게도 못 읽었다. 과연 언제 읽게 될 진 모르겠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만나게 되겠지.

 

[뱀다리] 참고로 에델바이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최정예부대인 팔쉬름예거 전사들이 달던 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로 치면 공수부대 마크 정도라고나 할까. 독일 파일럿들 중 다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은 그나마 남아 있던 기사도가 발휘된 마지막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파일럿 싸나이들은 에델바이스를 몰던 에릭처럼 상대편 기사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1:1 대결, 속된 표현으로 하면 맞짱뜨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득 1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에이스라는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는 삼엽기를 몰고 전투에 나서 무려 80대나 되는 적기를 격추했단다.

 

 

바로 그 리히트호펜을 주인공으로 삼은 <레드 배런>의 트레일러를 유튜브로 지금 막 봤는데, 로맹 위고가 그래픽 노블로 만들려고 했던 장면들이 그대로 실사영화로 만들어진 게 놀라울 따름이다. chase, fight and hunt 라는 표현으로 그를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장면에서는 자신들은 도살자가 아니라 '스포츠맨'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싶다.

 

극중에서 추락한 비행기 부품을 병사들이약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다수 발생했다고 하니 로맹 위고와 얀의 고증 작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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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2-21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세인트 루이스 부시 스타디움에서 카디널스의 약쟁이 마크 맥과이어가 비 오는 날 홈런 치는 거 직관했습니다. 걔네들 스타디움에서 파는 맥주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레삭매냐 2019-02-21 16:51   좋아요 1 | URL
아 비루 ! 역시 야구장에서 마시는 비루가
최고라고 생각합미다.

산동네에서는 비어 보이가 있던데 ㅋㅋㅋ
너무 부러워 보였습니다.

두 약쟁이 덕분에 파업 이후 비실대던 믈브
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가 참...

전 데릭 로우의 노히트를 직관했답니다 ^^

카스피 2019-02-21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참혹하긴 한데 사실 요즘 비행기 전투(F-22같은 경우 레이더에 안집히니 슬며시 다가와 미사일을 쏘면 적기는 영문도 모르게 격추되죠)보다는 그래도 레드바론이 활약하던 1차 대전의 공중전의 좀 낭만적인것 같긴합니다.

레삭매냐 2019-02-22 09:4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전자전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점점 인간의 능력이 소멸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인간의 감으로 공중전을 했다는 글
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카스피 2019-02-22 10:27   좋아요 1 | URL
1차대전 초기에는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공중전은 조종사끼리 권총을 쏘았다고 하더군요.그리고 격추될 경우 조종사를 쏘는 것이 아니라(2차대전 당시 일본조종사는 격추된 미군비행사를 기총소사했다고 합니다)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적 조종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당시에는 조종사들 대부분이 귀족이어서 그랬던 것아 아닌가 싶어요.

카알벨루치 2019-02-22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루 윙즈>이후로 또 읽어볼 요량입니다 희망도서 주문 넣어놨는데 부디 잘 나오길 기대 고대 ㅎㅎ

레삭매냐 2019-02-22 17:59   좋아요 1 | URL
얏호~ 오늘 드디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 도서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바로 집에 달려 가서 빌려야겠습니다.

모쪼록 희망도서 겟하실 기원하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2-22 18:04   좋아요 1 | URL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잘 읽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기대는 마시고~만화로 그렇게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참 대단타 싶어요 전 레삭매냐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1인! 광독과 탐독의 아우라가 ~주말 잘 보내소서!^^

레삭매냐 2019-02-22 21:55   좋아요 1 | URL
제가 너무 많이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
그래도 재밌긴 하네요.

가지고 있는 책들도 등장하고 또 사냥
욕구를 마구 불싸지르는 아이템도 보이
는 것 같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