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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다. 대가 줄리언 반스의 말씀이다. 근데 나는 줄리언 반스의 팬도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그의 작품을 읽는다. 작년에는 <시대의 소음>을 읽었었지 아마. 이것 또한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올해로 만 72세 노익장을 과시하듯 줄리언 반스는 그야말로 무르익은 필력으로 빚은 글밥을 독자에게 선사하듯 내던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19세 서식스 대학에 다니는 폴 ‘케이시’ 로버츠다. 첫 번째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서리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수많은 휴고들과 캐럴라인들 사이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기만과 냉소로 무장한 보수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북적이는 공간에서 폴은 자신의 엄마 뻘인 48세 수전 매클라우드 여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전에게는 남편도 있고, 폴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딸들도 있다고 한다. 그 둘에게 이번 사랑은 모두 두 번째 사랑이라고 한다.
29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할 것인가? 줄리언 반스는 바로 그런 나이라는 위계질서가 주는 위압감에 당당하게 맞서라는 주문을 하는 게 아닐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때 서로를 사랑했음을 기억하라는 대가의 조언은 정말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는 느낌이다. 그렇지,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그들이 기만과 냉소적인 결혼생활에 뛰어들진 않았겠지. 당연한 말씀이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그놈의 시간이 사랑과 결혼에 동록이 슬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물론 때로는 치유의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도대체 수전 매클라우드가 19세 소년을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케이시 폴의 자전적 고백을 통해, 비슷한 또래 아가씨들을 사귀는 친구들보다 더 깊숙한 위반감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사랑에 대한 절대주의적 자신감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예상한 대로, 그들의 사랑의 전사에 암운이 끼기 시작하면서 세상경험에 일천한 케이시 폴은 수전의 친구 조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다. 입이 걸고, 에두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 조운은 사랑의 멘토로서 딱딱 떨어지는 충고를 들려준다. 그런데 진정한 충고를 하려면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어야 한다고 했던가. 아마 조운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이었을 것이리라.
케이시 폴은 결국 수전이 남편 E.P. 고든 매클라우드에게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사랑의 도주에 나서게 된다. 물론 그전에 테니스 클럽으로부터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출당하는 수모도 겪게 된다. 줄리언 반스는 영국 중산층 계급의 가정이 도처에 가지고 있는 모호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일상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점잖아 보이는 신사 고든이 항시적으로 술에 취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는가. 케이시 폴과 수전의 관계만큼이나 사람들이 위선적인 영국의 중산층 사람들이 받아 들이기 쉽지 않은 장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결국 케이시 폴과 수전은 사랑의 도주에 나선다. 수중에 일전 한 푼 없었던 케이시 폴은 수전의 도주 자금에 의존해야 했는데, 조운의 말대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밥벌이의 지겨움이 그를 전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설 <연애의 기억>은 주인공 케이시 폴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가 변호사 공부를 하는 동안, 수전은 그를 집에서 기다리면서 그렇게 혐오하던 술 다시 말해 알코올을 탐닉하게 된다. 수전의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케이시 폴은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로 거듭나게 된다. 자신은 항상 사랑에 진실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돌이켜 보면 케이시 폴은 처음부터 수전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사방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가.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네들의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소설 같지 않은 소설 <연애의 기억>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천편일률적인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할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주변에서 모두가 만류하는 사랑을 선택한 동생이 있었다. 한 때 같이 살기도 한 동생이라,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결정을 내린 이들에게는 오랜 고심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말이다. 아마 케이시 폴과 수전의 도주도 그와 같았던 게 아닐까.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노숙하게 된 케이시 폴이 과거의 사랑에 대해 회고하며 느낀 감정들이야말로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 <연애의 기억>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모든 사랑에는 그들만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고, 실패한 사랑이든 아니면 아예 시작하지도 못한 짝사랑의 경험이든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untold story)의 사연들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반세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슴 아린 첫사랑이 정해 버린 삶의 포로가 된 케이시 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혹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