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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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어느 수업 시간에 교수님에게 왜 그렇게 청년들이 혁명에 목숨을 거냐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그 시절에는 혁명에,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군대라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회 적응 시스템을 거치고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허튼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득권의 철옹성은 강고하고 적폐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부재한 시절을 손아람 작가가 소설로 쓴 <디 마이너스>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나름의 독서 슬럼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나에게는 귄터 발라프와 만남에 버금갈 만한 그런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손아람 작가의 짧은 칼럼들은 많이 읽었는데 소설로는 처음 만났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라는 작가의 체험담 그리고 비둘기학번 혹은 00학번 불린 학생운동이 종언을 고하던 시절(모든 학생운동가들은 그들이 운동의 마지막 세대였다고 말했다지)의 전설들이 소설 <디 마이너스>에는 버무려져 있다.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마르크스는 청년들의 연구대상이었다. 그런데 무려 2000년도에도 여전히 독일 출신의 불세출의 사회과학자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숭앙받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물론 이제 대안은 아니고,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조재 정도의 역할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작은 소설의 화자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한때 그들이 그렇게 타도하고 싶었던 대한민국 자본의 맹주 삼성전자 홍보부에 다니는 박태의다. 그와 운동 동지였던 양진우의 청첩장이 잊힌 기억의 저편에서 가열찬 운동시절을 소환한다. 그래 그 땐 그랬지 아마. 작가는 스스로 모두가 가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는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아마 그동안의 삶을 통해 그 사실을 부인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예 소설의 공간적 무대를 서울대로 잡았다.

 

예전에는 사회과학 써클이라는 이름으로 새내기들을 모집하곤 했었지. 그동안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느라 사회 경험만 일천한 스무살 청년들이 그 어려운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고 사회모순에 격분해서 운동에 투신(투쟁 정신)하는지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튀는 놈들을 선배들은 될 성 싶은 떡잎이자 미래의 재목으로 보고 점지해서 키웠다. 당시 서울대에만 NL, 연대회의, 전학협의 세 개의 정파가 있었다고 했던가. 그중에 주인공은 가운데 조직인 연대회의 소속이었고. 나의 학생운동에 대한 기억은 전대협 혹은 한총련에서 끝나는 지라 IMF 이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투쟁 같은 이야기들은 정말 생소했다. 사수이자 훗날 연인이 되는 강남좌파 미쥬의 손길에 이끌려 세미나(명백하게 의식화 교육의 다른 표현이었다)에 참가하고, 사시를 패스하고 검찰이 되는 운동권 선배에 손에 이끌려 사수대 소속으로 차출되어 가열찬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그런 이유로 해서 사진 채증이 되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공범으로 화염병 투척조였던 동료 진우를 불게 된다. 그전의 농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학문의 전당이라기 보다 이제는 보다 나은 직장과 미래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한 직업훈련소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모습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럴 바에야 대학을 만들 게 아니라, 유명직업훈련소로 개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음대 출신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무언가 더 알아 보겠다는 조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긴 교수의 작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지금 같으면 미투운동으로 당장에 옷을 벗길 인간의 모습이 아니던가.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가 <외면 일기>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설 <디 마이너스>의 시간은 동지 간의 우정도, 사랑도, 정파간의 증오도,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동력이 되었던 사회 모순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대의명분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어떤 명분을 가지고 가열찬 투쟁의 전선에서 명예롭게 퇴진하는가의 문제가 달렸다. 순차적으로 영웅들이 무대에서 퇴장을 시작한다. 사수대의 무시무시한 전사 대석 형이, 뛰어난 조직가이자 자본의 굴레를 뚫고 약자의 편에 서려고 했던 미쥬가, 연대회의 정파의 불모지 공대에서 마침내 회장에 당선된 진우가 그리고 마지막 태의가 학생운동이라는 무대를 떠난다.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부질없어진 선수들이 떠난 무대를 또 누군가는 채우게 되겠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154편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 동안 행복했다. 결정적으로 부재한 시간들을 메꿀 수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사랑에, 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어떤 후일담이 등장할까. 손아람 작가가 들려주는 훗날의 에피소드들은 하나 같이 아쉬움 그 자체였다. 한 때 무엇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신념을 지금 일상의 안위의 가치와 교환한 데서 오는 비루함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칙칙한 운동권 스토리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좌파 이론가로 촉망받던 수리가 학교 축제에서 번쩍이는 횟칼을 들고 47마리의 광어를 해체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이야기, 선봉대장을 따라 학교를 휴학하고 투쟁선봉대원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노동현장에서 가진 자각의 순간들, 평생 보수로 살아 왔지만 정작 자신의 일자리에서 내몰리게 되자 얼결에 닥터 이블 김정일에게 핵폭탄 한 방을 떨궈 달라는 요청을 한 경상도 아지매의 일화 등 손아람 작가의 번쩍이는 유머들이 돋보이는 순간들도 빼놓으면 안될 것 같다.

 

우리 때는 이런저런 사회적 모순을 견딜 수 없게 된 양심으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산 것 같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또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고민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닐까. 그 때의 동지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도 또 궁금하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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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9-10 13:13   좋아요 1 | URL
오늘 어느 기사를 보니 국민연금 그리고 부동산
으로 촉발된 세대 간의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성장의 과실을 독점해 버린 기성세대와 그렇지
못한 청년세대의 괴리...

길항하는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을 어떻게 다스
려야 할지 걱정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0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나에게 추천해주시네요 ㅎㅎ

레삭매냐 2018-09-10 20:01   좋아요 1 | URL
오래 전 사두고 읽지 못하던 책이었는데
어젯밤에 새벽까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 재미 하난 기똥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