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이 - 르포기자 귄터 발라프의 인권 사각지대 잠입 취재기
귄터 발라프 지음, 서정일 옮김 / 알마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올해 최고의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우연히 온라인 신문기사를 통해 독일 출신 암행취재 전문가 귄터 발라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책들을 구해 읽기로 했다. 그와 나의 첫 번째 조우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 책이 절판되어 수원에 있는 중고서점에까지 가서 사다 읽었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라인강의 신화라는 패전 뒤 산업화로 일어선 독일 성공신화의 그늘을 벗겨난 르포 기사에 거의 충격을 받았다. 자본의 힘에 좌우되는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저격하고, 독일 사회에 만연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 멸시, 착취의 기원을 파헤친 수작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라는 대명제로부터 자유로운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해주기도 했다.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던 1980년대, 자본의 이동은 국경을 초월해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졌지만 노동의 이동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산업 부흥기에 독일에서는 소위 3D업종에 종사할 국내 인력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한 세기 전에는 폴란드 출신 노동자들이 루르 지방으로 유입되었다면, 20세기에는 그 자리를 터키와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채웠다. 산업폐기물과 오염물질을 다루는 그야말로 험악한 일들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독일 산업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독일에 정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나 무슬림 터키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40년이나 흘렀어도 여전히 히틀러 총통 시절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도 여전히 개발독재 시절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총통 시절에는 빵과 일자리가 흘러넘치지 않았냐며 말하는 용역회사 사장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자신을 색깔 있는 컨택트렌즈와 콧수염 그리고 어눌한 독일 말투로 위장하고 터키 출신 이주노동자 알리로 완벽하게 변신시킨 귄터 발라프는 독일식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노동 시장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은 맥도널드 매장에서의 노동 착취는 그야말로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가톨릭 사제들의 위선도 자본가들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추방 문제 때문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비관료적인 방식으로 속성 세례를 해주면 안되겠냐는 알리의 요청에 대다수의 사제와 주교들은 그야말로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나마 신의 소명을 지상에 실천하는데, 한 명의 폴란드 출신 의인이 등장해서 알리를 돕기도 한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것이었을까.

 

알리/귄터 발라프의 본격적인 암행취재 대상은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 아우구스트-티센제철(ATH)이다. 순전히 비용절감과 위험의 외주화라는 방식을 선진적으로 창출해낸 티센은 다수의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용역회사 렘메르트와 아들러에게 정말 위험한 현장을 내맡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안전이나 건강이 아니라 오로지 납기에 맞춰 발주를 끝내는 것이다. 기본적인 보호장구들인 안전모, 작업화, 장갑 그리고 방진마스크 같은 장비들도 지급하지 않은 채, 이주노동자들을 거의 사지에 내몬다. 귄터 발라프는 그런 용역회사를 사람 장사를 인신매매단과 다를 게 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원청회사인 티센은 위험수당을 포함해서 52마르크의 시급을 지급하는데, 하청회사인 렘메르트가 절발은 가져가고, 재재하청인 아들러가 16마르크를 그리고 정작 노동자들에게는 10마르크 내외가 지급되는 사실은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모습과 닮아 있을 수가!

 

이주노동자들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은 또 어떤가. 당장 일자리가 없으면 자신에게 딸린 식구들이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에 갖가지 산업재해에 시달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전전하는 터키 출신 노동자 동료들에 대한 스케치도 빠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몸을 이끌고, 자그마치 30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험한 일을 하는 이들을 굴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들러는 갖은 편법을 동원해서 수하의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제대로 된 수당과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편법과 탈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한다. 게다가 자신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뇌물을 주기적으로 상납하기도 한다. 최근 터진 독일 자동차 업계의 비리는 어쩌면 독일기업 신화에 대한 전세계 소비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독일기업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는 백미는 방사능 노출에 대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주지하면서도 이윤에 눈이 먼 아들러가 죽음의 돌격대를 구성해서 돈벌이에 나선다는 상황극이다. 감언이설로 아들러의 운전사이자 바디가드로 승진한 알리는 마지막 연극에 나선다. 뷔르가센원자력발전소에 긴급하게 뒤탈이 없는 8인조 이주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며, 아들러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결국 6인조로 구성된 터키 이주노동자들이 모집되고, 한바탕 연극판이 벌어진다. 알리는 자신의 상관 아들러가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를 기대해 보지만, 이윤에 눈이 먼 자본가 아들러는 위험에 대한 의심도 하지 않고 무모한 도전에 나선다.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의 맹목적 추구 앞에 인권이나 노동자들의 건강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귄터 발라프 역시 실험 인간과 티센의 코크스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만성적 기관지염과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원전 잠입취재에도 자신이 직접 참가해 보려고 했지만, 주치의의 만류로 시도하지 못한 겁쟁이라고 그는 자책한다. 하지만 알리/귄터 발라프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길을 간 위대한 저널리스트였다. 나처럼 단순하게 문제를 의식하는 것과 현장에 직접 참가해서 그와 같은 르포 기사를 쓰는 건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발라프의 희생적 르포 취재로 독일 사회의 다수 시민들의 양심을 일깨우는데 성공했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다수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티센과 맥도널드는 고소 고발로 대응했다. 물론, 그의 책에 실린 취재가 기폭제가 되어 독일연방과 주정부들은 노동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현실에 대하 조사와 감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공정거래위원회 같이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와 관행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관청의 관리자들이 은퇴 후에 재취업을 위해 암묵적 거래를 해왔다는 것이 최근의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자본의 통제는 언론을 뛰어 넘어 이제는 통제불능으로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왜 한국에는 귄터 발라프 같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실에 접근하는 진정한 의미의 저널리스트가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자본은 여론을 주도하는 능력을 가진 언론을 길들이는데 다년간 공을 들여왔다. 기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업으로부터 공여 받는 사적 이익 때문에 해당 기업을 작심하고 비판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슨 무슨 장학생이라는 그야말로 사회의 공기라는 언론으로서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하지 않았던가. 주지하다시피 권언유착은 이제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폐가 된 지 오래다. 광고수주라는 방식으로 언론이 기업에게 점점 더 종속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언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론 종사자들이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와의 최전선에서 여전히 차별과 싸우고 있는 귄터 발라프의 암행취재와 노고를 열렬하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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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26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봐야겠네요 레샥님 굿모닝!!! 즐건 하루되십시오!

레삭매냐 2018-08-26 09:49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합니다 -
정말 좋은 책입니다.

다만 이런 책이 절판이라니 아쉽네요.

카알벨루치 2018-08-26 12:16   좋아요 1 | URL
레샥매냐님 절판책 잘 고르세요 ㅋㅋ

syo 2018-08-26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으로부터 ‘올해 최고의 발견‘이라는 표현을 길어올리다니 굉장한 책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ㅎㅎㅎ

꼭 읽어 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18-08-26 15:49   좋아요 0 | URL
정말 주변에 추천해 주고 싶은 책입니다.
이제서 알게 되었다니.

전 두번째 책으로 <언더커버>도 오늘부
터 시작합니다.

올해 나온 책은 어제 주문했는데 당일
배송의 구라는 지켜지지 않았네요 ㅠㅠ

2018-08-26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8-26 15:50   좋아요 0 | URL
한국의 언론들은 창피한 줄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팩트조차 임의가공해서 미디어에 살포
를 해대고 있으니까요.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을 연마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
니다.

뒷북소녀 2018-08-26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품절이라뇨ㅠㅠ

레삭매냐 2018-08-26 21:42   좋아요 0 | URL
그리하여 당장 읽지 않아도 품절/절판
될 수 있으니 미리 사서 쟁여 두자는.

사재기를 위한 변명이었던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