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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온라인 기사로 우리가 현재 즐겨 먹는 바나나 캐번디시가 곧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읽었다. 사실 어려서 바나나는 정말 귀한 과일이었다. 씨도 없고, 한 입 가득 베어 먹었을 때 풍기는 과육의 느낌이란! 한 개(finger)에 한 5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일년 봄가을에 가는 소풍날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그 전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풍 당일날 한 개씩 소중하게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하도 흔해 빠져서 트럭에서 파는 과일장수 아저씨는 한 다발(hand)에 단돈 5천원에 파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 댄 쾨펠은 전 세계를 매료시킨 이 열대 과일 바나나에 대한 보다 생생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르포르타주 <바나나>에서 다룬다.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바나나의 기원으로 시작해서, 성경에도 등장하는 선악과가 아니라 바나나였을 거라는 합리적 추정도 내놓는다. 물론 성경학자들이 듣는다면 이단으로 몰리겠지만. 기원전 5천년부터 파푸아 뉴기니에서 재배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바나나는 동남아에서 출발해서 지구를 한바퀴 도는데 거의 7천년 정도가 걸렸다. 전 세계에서 쌀,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 생산량을 자랑하는 이 열대과일은 누구에게는 기호식품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자원으로도 소중하게 작동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기근발생은 다반사로 알려져 있는데, 우간다를 비롯한 자신의 텃밭에서 바나나를 길러 식량으로 삼는 나라에서는 대량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편, UFC과 스탠더드 프루츠 같은 다국적 바나네로스(바나나 기업)들은 현대문명 기술발전의 세례를 톡톡히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바나나 생산을 담당한 일명 바나나 공화국(과테말라과 온두라스) 독재자들과의 단단한 정경유착도 한몫했다. 바나나를 수확해서 소비처(북미대륙)까지 운송하는 단계에서 냉장시설이 개발되기 전까지 바나나의 갈변을 막는 건 바나나 산업 초창기의 최대 고민이었다. 원래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바나나 산지는 자메이카였다고 한다. 미국의 탐욕적인 사업가들은 바나나 무역이 돈벌이가 될 거라는 점에 주목하고, 현란한 마케팅과 열대과일의 매력을 한껏 강조하면서 미국인들의 식탁에 바나나 올리기 작전을 시작했다.
종자로 번식하는 식물이 아닌 바나나는 단일품종으로 대단위 재배에 적합했다. 그 결과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로 대변되는 중앙아메리카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바나나 플랜테이션이 세워졌고, 바나나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바나나 생산에 나섰다. 코카콜라처럼 박리다매 전략이야말로 수익을 창출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바나나 기업의 소유주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방 정부를 압박해서 거의 헐값에 가까운 비용으로 농지를 인수하고 세금까지 절감받으면서 UFC와 스탠더드 프루츠 그리고 델몬트로 대변되는 바나나 기업들은 승승장구했다.
바나나 기업의 호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나나 대단위 재배를 가능하게 한 단일품종 그로 미셸을 습격한 파나마병(푸사리움 곰팡이에서 유래한 잎마름병)이 그야말로 바나나 농장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흙과 토양이 아닌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싱가토카병까지 발명하면서 기존의 그로 미셸 종은 지구상에서 멸종되었다. 대신 파나마병에 상대적으로 내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캐번디시 바나나가 우리가 요즘 즐겨 먹는 바나나의 대세가 되었다. 저자는 필리핀에서 생산되는 라카탄 바나나도 역시 파나마병에 시달리는 캐번디시의 대체종으로 추천하고 있지만, 반세기 전 그로 미셸에서 캐번디시로 갈아탈 때 소비자들의 저항만큼이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는 경고장을 발부한다.
그런데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 파나마병이 발병하자 바나나 대기업들은 야생종 바나나와의 변종을 개발해서 파나마병이나 싱가토카병에 대한 내성을 갖춘 품종을 개발하지 않고 대신 손쉬운 방법으로 농약을 살포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물론 전자가 지리한 연구와 시간을 요구한다는 건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후자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바나나 기업들이 지불해야할 기회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우선 파나마병으로부터 안전한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농지를 개발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해야 했고, 바나나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농약 때문에 직접적으로 불임이나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저임금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UFC 같은 기업은 불법적으로 과테말라나 콜롬비아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노조의 결성과 파업분쇄를 사주했다. 실제로 미국 CIA의 지원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 때 과테말라에 있던 젊은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을가. 5년 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미국 바나나 기업들이 쿠바에서 소유하고 있던 농장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이에 대한 복수로 UFC는 다시 한 번 CIA와 결탁해서 쿠바 혁명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백색대함대’로 피그스만 침공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9년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바나나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도 등장할 정도로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댄 쾨펠은 우리가 마트나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서 소비하는 바나나라는 열대과일에 대한 리포트를 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세계를 누비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1년에 설립된 벨기에의 루뱅 연구소가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 싸우는 장소라는 점도 특이하다. 대개 표본을 구하기 쉬운 라틴 아메리카 최대 바나나 생산지인 에콰도르나 또다른 바나나 공화국인 과테말라나 온두라스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여하튼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는 기업이나 국가를 초월한 협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과연 저자인 댄 쾨펠이 제시하는 유전공학 바나나가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GMO 표시를 하자는 주장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마 기업들 입장에서는 GMO 표기를 하는 순간, 차례로 해당 식품(책에서는 프랑켄푸드라고 꼬집어서 말하고 있다)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을 제공하게 될 거라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최소한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경로로 해서 유통되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게 아닌가.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육종을 개량하고, 잎마름병에 대한 내성을 가진 품종을 개발하자는 저자의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유전자공학적으로 설계된 바나나가 정답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최근 마다가스카르에서 파나마병에 내성을 가진 야생종 바나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속히 DNA 분석에 나서고 다섯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는 녀석을 구출해서 캐번디시 바나나를 계속해서 먹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