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원 (리커버 에디션)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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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아버지 창피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부정하고 싶은 그런 존재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얼마든지, 주위의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었던 아버지는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자비를 들여 장만한 어릿광대 분장 도구와 교통비를 들여가며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걸까.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바로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 소설은 프랑스에서 세기의 재판으로 명명된 모리스 파퐁 심판정에서 입장을 거부당한 어릿광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릿광대는 바로 주인공 나였다. 어릿광대를 아버지를 그토록 수치스러워 하던 소년이 어른이 되어 어찌해서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대중 앞에 서게 되었나.

 

그 이유를 독일 군대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러 갔던 날, 가스통 삼촌이 들려준다. 나치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던 1942년에서 1943년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레지스탕스 소속이었던 스무살난 아버지 앙드레와 삼촌 가스통은 전기공으로 변장하고 두에 역의 변압기를 폭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장 물랭이나 로맹 가리처럼 불타는 애국심으로 조국을 위해 싸운 이들이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쿨한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나치들에게는 테러행위로 보이는 변압기 폭파사건이 어떤 후과를 초래할지 몰랐다는 점이다.

 

얼마 전,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을 요격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악명을 떨친 기계화친위사단 다스 라이히가 프랑스 북부로 향하던 중 레지스탕스의 공격을 받고 오라루드 쉬르 글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레지스탕스에게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된 다스 라이히 부대원들은 무려 천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인질로 잡은 프랑스 시민들을 거리의 가로등에 매달아 죽이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앙드레와 가스통의 운명도 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축구 경기에서 자신들의 팀에 진 프랑스 헌병대원의 무고로 잡혀 변압기를 폭파한 진범이 나타나지 않으면 대신 죽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바로 그들이 진범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사실을 독일군에게 말하지 않으면 애꿎은 인질 앙리와 에밀 역시 죽게 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통한 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엉성한 독일 병사 베르나르 비키와 만나게 된다. 생과 사의 기가 막힌 갈림길에서 비키의 엉뚱한 행동 덕분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한껏 웃음을 만끽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라니.

 

진흙구덩이에서 죽음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들은 진범이 잡혀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해 한다. 구덩이 속의 인물들은 이송 도중에 탈출해서 제각각의 삶을 살아간다. 엔딩 부분에서 드러 진실은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뺨치는 반전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짧은 소설이 그렇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성공신화를 그리던 모리스 파퐁은 전쟁 중에 자신이 저지른 반인륜 범죄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파리 경찰국장, 하원의원 그리고 예산장관도 지냈으며, 1962년에는 드골이 수여한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보르도 치안부국장으로 재직하던 파퐁은 어린이들 223명을 포함한 1,69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 강제이송한 파렴치한 꼴라보였다. 나치 치하를 경험한 서구에서 반인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다며 국가 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점에서 파퐁 재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심대하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역사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후세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과거에 대한 기억 없이 미래로 달려갈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난망한 문제다. 어릿광대로 살던 아버지 앙드레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들은 진정한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알게 됐다. 과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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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03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중학생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입니다. 겉모습은 가벼워 보여도 내용은 묵직했던 책이었습니다. 중학교 독서 기록장을 열심히 썼을 때 이 책 독후감을 쓴 적 있어요. ^^

레삭매냐 2018-07-03 14:18   좋아요 1 | URL
뒤늦게 읽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
역시나 명불허전이라고나 할까요.

곁에 두고 시간날 때마다 읽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