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할 책들이 많은데 또 외도 중이다.

<호랑이 남자>를 읽고 나자, 그전에 사두었던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생각이 났다. 어찌 하오리까, 일단 다른 책들은 접어 두고 이 책부터 읽게 됐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 에카 쿠르니아완

Beauty Is a Wound

 

이름도 사실 외우기 힘든 인도네시아 출신 작가의 글에 매료되어 버렸다. 매혹적이다 못해 고혹적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소설 <호랑이 남자>를 먼저 읽고 나서 집의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장편 데뷔 소설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퇴근 길에 마침 들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노래>도 읽기 시작했는데... 호메로스의 고전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글이 마음에 들었다. 고전은 이렇게 우려 먹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또 삼천포로 빠졌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는 <호랑이 남자>에 버금갈 정도의 위력을 가진 그런 소설이다. 출발부터 범상치 않다. 소설은 21년 전에 죽은 주인공 데위 아유가 되살아나 현실 세계로 들어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때 죽이는 한 방 아닌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결혼한 중늙은이 마 게딕이 사랑한 마 이양의 러브 스토리는 또 어떤가. 이번에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할리문다가 그 배경이다. 곧 싱가포르에 이어 바타비아까지 장악한 일본군이 등장할 차례다.

 

인도네시아 싸구려 (포르노) 소설과 서구의 근엄한 고전의 이종교배를 통해 나온 소설이라고 하는데 후자보다 개인적으로 전자에 더 호감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이 재밌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 소설읽기에 전념하고 싶다. 유머는 어찌나 또 찰진지. 아직 채 100쪽도 읽지 못해 총평을 내리기엔 그렇지만, 올해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 다른 사람들은 현금으로 내>도 연달아 번역되면 좋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강추하는 바이다.

 

자, 다음 타자는 <아킬레우스의 노래>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 역시 한 번 불이 붙으면 당장에라도 읽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는데 에카 쿠르니아완의 책 때문에 밀렸다.

 

아 그리고 보니 매들린 밀러의 소설도 데뷔작이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책이 비슷한 궤적에 놓여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내가 <호랑이 남자>를 먼저 읽고 쿠르니아완이 구사하는 인도네시아 스타일의 주술적 리얼리즘에 훈련이 되었다는 점 정도.

 

전자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자랑한다면, 후자는 역시 고전에 방점을 찍고 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는 셰익스피어 다시쓰기 시리즈가 현대의 작가에 의해 거듭해서 새로 쓰이는 것처럼 서양문화의 두 가지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신화와 기독교(엠마뉘엘 카레르의 르포 소설 <왕국>) 역시 끝없이 반복과 변주라는 과정을 통해 재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그렇게 울궈 먹을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문학의 잠재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아무리 울궈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저작권 문제를 들먹이겠는가. 손쉬운 선택지이면서 동시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욕을 얻어 먹을 수 있는 도전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매들린 밀러의 소설은 커트라인은 통과한 셈이다.

 

소설의 시작은 아킬레우스의 전우이자 애인인 파트로클로스의 출생과 헬라스 세계의 최고 미녀 헬레네에 대한 구혼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꼬마 파트로클로스 역시 구혼자 대열에 끼어 보지만 사실 어림도 없는 도전이었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꾀쟁이 오디세우스가 모든 그리스 영웅들을 트로이 전쟁에 몰아 넣게 만드는 서약을 하는 장면도 흥미진진하다. 고래의 서사시/노래를 추구하는 필멸의 존재들인 인간/영웅들의 이야기, 성인이 되기 위해 소년은 거친 통과의례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킬레우스와 다시 만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지 좀 더 읽어 봐야지 싶다.

 

오늘 논할 마지막 책은 그 이름도 높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집이다. 아직 나오지도 않아서 어떤 책인지 가늠할 순 없지만 국내에서 과연 출간된지 요원해 보이는 <한없는 웃음>을 기다리며 몇 자 적어 본다.

 

우연히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독서모임에서 우리의 친구 브랜던에게 물어 보았더랬지. 그랬더니만 책 좀 읽는다 하는 선수들은 다 알고 있지만, 그 악명 높은 책을 완독한 이가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호기심에 원서러도 입수해 놓았지만 두터운 싸이즈에 쫄아서 그저 쓰담쓰담만 할 뿐이다. 어서 빨리 번역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아, 그리고 제시 아이젠버그가 나오는 영화도 좀 찾아서 봤는데 작가와 비슷한 외모의 주인공이 등장해서 신기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찾아간 또다른 작가의 이야기.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이서 같이 눈길을 달리는 여행길은 아 전형적인 미국식 로드 무비의 재림이로구나 싶었다. 시간 내서 이 영화도 봐야지 싶다.

 

책은 주문해야겠다. 어서 빨리.

 

 

[뱀다리] 영화의 제목은 <the end of the tour>이었군요.

 

인터뷰어는 데비잇 립스키.

 

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반다나를 쓰고 있는지...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가 봅니다.

 

 

[뱀다리2] <한없는 웃음> 본문만 981쪽에 주석도 100쪽
이나 되네요... 출간하라 출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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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03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레삭매냐님 페이퍼는 가급적 안 보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오늘도 걸려서 봤습니다.
소설 책 좀 푹 빠져서 읽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습니다.ㅠㅠ

레삭매냐 2018-04-03 19:11   좋아요 1 | URL
요즘 괜찮은 책들이 연달아 나와서
도저히 안 사고 못배기게 만드네요.

로맹 가리의 책도 그렇고...
체사레 파베세의 책도 읽어 보고 -

그리하여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

AgalmA 2018-04-03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홓~~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이렇게 붐이 일어나나요! 아웅, 좋아!

레삭매냐 2018-04-03 22:17   좋아요 1 | URL
인피닛 제스트가 안된다면 다른 소설이라도
속히 번역이 돼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에세이집은 짜집기 스타일의 책으로
보이네요. 어쨌든 대환영입니다 !

목나무 2018-04-04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저 영화 보려구요.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여행의 끝>이더라구요.
이번 에세이집은 월러스의 세권의 에세이집 중에서 고른 것들을 묶은 거더라구요.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감사하며 읽으려구요!

레삭매냐 2018-04-04 10:2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는 <여행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가 되었군요. 저도 시간 내서 봐야겠어요...

월리스의 소설도 순차적으로 나왔으면 하네요.
도서관에 사달라는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요? ㅋㅋ

사서 읽어야 하는데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한 박자 쉬고 들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