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절판
이브의 세 딸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은 건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고 썼다가 지운다. 그냥 눈이 좀 따갑고 침침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며칠 혹사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꽤 집중해서 본 책인가 싶다. 엘리프 샤파의 ‘이브의 세 딸’이라는 이번 작품. 영광스럽게도 이 책이 내 시력에 문제를 가져다 준 것일까. 그러면, 그렇다면 이 또한 영광이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니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접근법을 써야 할지, 아니면 세부적으로 조목조목 따져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러나 어떤 접근법으로 들여다보든지 간에 이 책은, 생각할 거리가 충분히 많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자, 이제 정말 어떤 식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냥 생각이 이끄는 대로?
소설은 페리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는 2016년 이스탄불에 존재하는 페리의 현재와 1980년대 이스탄불이라 불리는 페리의 유년의 과거, 2000년대 그녀의 영국 옥스포드 대학시절의 과거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끌고간다. 어쩌면 일종의 회상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모든 회상은 짐짓 자리를 잡고 앉아 돌이켜보는 그런 여유로움의 의미가 아니다. 뭐랄까, 훅 달려드는 시간의 충격 같은 이미지들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미 지워진 것들과의 예기치 않았던 충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핸드백을 분실하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였을까. 왜 주인공 페리는 낡은 사진과 함께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기독교와 이교도의 갈등, 문화적 차이, 성적 차별이 가져오는 문제들, 그 안에서 상처받고 숨죽이며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가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어쩌면 우리모두가 함께 생각해봐야만 하는 문제들을 수면 위로 떠올리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성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는 여전히 인종, 종교, 페미니즘, 정치와 전쟁, 모든 지식과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올바른 성토와 토론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과연 지금도 인식의 공감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모르겠다.
신에 대한 철학이라. 과연 인간은 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그 허락이 인정될 수 있을까. 주인공 페리의 시각과 아주르 교수의 시각은 대립각을 이루는 듯 보인다. 그의 겉모습만 보면 여느 학생들의 시선처럼 피해야 할 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선입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건 또다른 백미다. 관점에 따라 그가 비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는 신께 용서를 구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신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일은 그가 선택한 하나의 길이었으니까.
“교수님은 죄책감 없는 사랑을 원했던 거군요.”
“아마도.” 아주르 교수가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너는 하나님의 사과를 기다렸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p550
책을 읽는 동안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표현이 생각났던 것 같다. 원죄의식. 인간은 모두 그 원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을 남겼던 교수는 아마 불교신자였지.
우리는 당연히 다양한 종교 안에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누구는 기독교인으로, 누구는 무슬림으로, 또 누구는 불교도로, 그도 아니면 무신론자로 말이다.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안타까운 일은 이들 모두가 오묘하게도 각자의 원죄의식을 힘겹게 끌어안고, 자신만의 신념과 현실에서의 부조리 안에서 혼란을 경험한다는 점이다(지나친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다만) 생각해보니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 결과 때로는 개개인의 삶의 상처와, 크고 작은 사회적 모순을 너무나 쉽게 간과하려는 잿빛 시선만이 만연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지켜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이기심과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이 재앙을 초래한 오빠에게, 이렇게 되지 않도록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그녀의 부모에게, 다리 사이에서 사람의 가치를 찾는 이 수백 년 된 모호하고 어두운 전통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p 265-264
작품에 대한 개인의 시선이 이렇게나 혼란스럽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보니 정리가 잘 되지 않는가보다. 그래도 뭐랄까. 함께 토론해보고 싶은 책이다. 페리와 쉬린 그리고 모나. 우유부단한자, 무신론자, 독실한 신자(p502) 여기 이브의 세 딸들이 있다. 이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초상(肖像)이 아니었을까.
신에게서 그토록 많은 것을 배우다 보니
나는 더는 기독교인도, 힌두교도도, 이슬람교도도,
불교도도, 유대교인도 아니다… …
내가 그토록 많은 진리를 깨닫다 보니
나는 이제 남자도, 여자도, 천사도 아니며,
더욱이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