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을 고백하다 백제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재발견 1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쉰 두 번째 서평

근초고왕을 고백하다-이희진 지음




 역사, 숨은그림찾기




 역사란 자잘한 그림이 숨어있는 그림판과 같다. 관심이 있어 계속 들여다보면 정답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숨은그림찾기 말이다. 그 안에는 사실 설명할 수없이 무한한 인간의 심리가 반영되는지도 모른다. 인간심리와 역사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매력을 갖는다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당대의 문화를 비롯한 정치적 상황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전쟁사인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좁은 땅위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참 미묘한 감정을 동반하곤 한다.

 어느 역사학자는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사유재산의 인식을 기점으로 시작한 정복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근거로 논하기도 하고, 혹자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분노 표출을 위한 인간본성에 축을 두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전쟁은 늘 상반된 결과를 동시에 불러들인다는 생각을 한다. 패전에 대한 상처와 더불어 절망과 낭패감을 딛고 일어서는 긍정적인 희망에 대한 메시지가 아닐까.




 저자 이희진의 ‘근초고왕을 고백하다’는 기존에 역사에서 한 곁으로 밀려나 소외된 듯한 백제를 타깃으로 집필 의도된 역사서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기존에 역사서가 풍겼던 딱딱함이나 묵직한 무게감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이희진은 비교적 섬세하면서 세밀한 시각으로 백제를 중심으로 주변국들 간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각각의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기록하는 동시에, 중요한 시기별로 벌어졌던 정치 경제적 활동 그리고 전쟁에 대한 기록을 사료와 정보를 비교 분석하는 노력을 보인다.

 

 책은 4세기를 기점으로 근초고왕의 등장과 6세기 성왕의 시대까지 한 틀을 잡고 있다. 국가들 간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목과 회유. 동맹의 결성과 파기가 이어지는 역사는 결론적으로 위대한 왕과 더불어 훌륭한 지략과 군주에 대해 충성을 다한 장수의 이름을 역사라는 거대한 반열위에 올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책을 보는 동안 개인적으로 머릿속에서 차고 넘쳤던 생각은, 어쩌면 이들 나라들이 이다지도 우매할 정도로 서로 견제를 하며 정복의 야욕을 즐겼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근초고왕을 고백하다’는 백제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지만 주변국의 이이야가 절반 이상으로 담겨져 있다. 백제라는 나라를 논함에 있어 당대의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필요조건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의 복잡했던 당시 상황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인 듯하다. 때문에 독자는 비교적 쉽게 당대 얽히고 꼬일 수밖에 없었던 나라간의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우선 삼국으로 유명한 고구려와 백제 신라 이외에도 당대 일본의 입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더불어 이들 나라의 배경에 가려졌던 자잘한 약소국이었던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등도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이번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백제이기에 근초고왕과 성왕에 대한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함이 옳은 예의가 아닐까 싶다.

 

 책의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잘못 인지되어 있는 백제라는 국가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한 지식을 바로 잡고 재 인지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이행하기에, 이 책은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 끌고 가는 고정된 시선이 단점 아닌 단점으로 부각되는 감도 없지 않다.

 백제 근초고왕과 성왕에 대해 생각할 것들이 전쟁밖에 없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이 역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책은 단순히 백제를 재조명하기 보다는 두 왕을 근간으로 한 백제 전쟁사에 대한 재조명이라 해야 옳은 말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책의 성격을 완전한 역사책이 갖는 그것으로 시작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이 주는 느낌은 비교적 부드럽고 가벼운 역사서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면모가 가져오는 문제점들은 약간의 산만함이 아닐까도 싶다.

 이는 저자가 갖는 과한 친절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친절하게도 너무나 자세하게 저술하고 있기에 표를 집어넣어 요약과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무작정 풀어쓰는 서술 방식에 지루함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부분 역시 저자의 노고에 의해 무뎌지는가 싶다.




 1장과 2장으로 근초고왕과 성왕의 시대를 구분하고, 다시 당대의 상황과 업적을 분류하는 동시에 자잘한 제목을 달아주면서 내용을 집약하고 요약하는 작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각설하고, 내용면에서 비교적 꼼꼼한 서술 그리고 사료수집과 더불어 비교 분석이 작가의 노력과 성실함을 대변해주었던 이번 책이, 사람들의 인식저변에 흐릿하게 남겨져 있던 백제를 새로운 틀 안으로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빙하시대 이야기 - 영화처럼 재미있는 창조과학의 세계 창조과학 파노라마 4
이재만.최우성 지음 / 두란노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쉰 한번 째 서평

빙하시대 이야기-이재만, 최우성 지음




선택, 자유의지 그리고 신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익히 잘 알고 있으면서 친근한 이야기중 하나가 바로 천지창조와 관계된 이론이 아닐까 싶다. 신께서 세상을 만들고 인간과 온갖 동식물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둘 중 하나를 골라라, 는 식으로 말이다. 자연과학이 내포하고 있는 진화론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천지창조 이론을 믿을 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과 선택은 그 의식전반이 무엇으로 잠식되었는지에 대해 결과를 달리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과연 결론지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의구심과 회의는 아직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빙하시대를 논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빙하 이야기라는 결론이다. 창조과학이란 말이 조금은 생경스럽다. 어쩌면 종교적인 관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생활을 오래도록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창조과학이란 말은 내게 있어 처음부터 낯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책은 다소 낯선 학문의 한 중심에 선 이들이 평범한 이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종교적 메시지(과학을 근거로 한)라고 보여진다.




책은 비교적 정확한 실증과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창조과학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신의 천지창조 이론을 믿고, 그 이론에 입각해서 자연현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하나의 개념이자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직까지 ‘창조과학’이라는 어휘 자체만을 두고 봤을 때는, 대중성과 인지도 면에서 다소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가설이고,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입증하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는 여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창조과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 빙하시대 이야기 속에 깊이 들어가 몰입하노라면 모든 이론과 학설 그리고 개념 또는 증거들은 일제히 하나의 결과를 향해 잘 짜여진 그물망처럼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게 한다.

빙하시대가 오게 되는 과정과 이 시기가 오게 되기까지의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설명하고 있는 요소들은 다분히 창조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자의 시선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보여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과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도, 자연과학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점을 일일이 찾아 따박따박 지적하고 그것을 다시 성경적 관점인 창조과학의 입장에서 반박하며 풀어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빙하기는 노아의 방주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노아의 홍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거대한 양의 물. 신의 경고와 구체적인 징벌의 예시,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용서와 평화 정도로 기억할 수 있을까. 사실 책 속에는 빙하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를 수록한다.

인종에 따라 다른 언어와 피부색, 생물의 진화와 분화에서는 흥미롭게도 메머드와 공룡도 등장한다. 그 외 자연화경에 따라 지배받는 유전자의 생태까지 비교적 깊이감 있게 서술되는 부분도 눈에 띈다.

결론을 내리자면 ‘창조과학의 입증과 재확인’ 이라고 본다. 그 한 가지 예를 빙하로 들었을  뿐이다. 책은 노아의 방주와 빙하시대의 연계성을 자연과학적 시선에서 풀어가는 동시에 기실 천지창조 이론에 대한 개념을 입증하면서 확신하고 있다.




 책을 읽을 때 항상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책을 읽다가, 내용에 너무 몰입해서 눈이 어두어지는 일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일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중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원했던 책읽기는 마지막 까지도 중간자의 입장을 버리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양한 증거와 자료를 제공하고 구체적으로 풀어가는 내용을 접하면서도 다소 자연스럽지 못한 작의적 느낌을 받았던 것까지 부인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잡다한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고서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을 믿는다. 어쩌면 터무니없이 복잡하기만 한 내 안의 사고와 개념의 의식조차 신이 허락한 큰 은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2 - 건축가 김원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2
이용재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쉰 번째 서평

궁극의 문화기행 2-이용재




건축과 예술 그리고 사람




오래전에 이따금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드라마가 생각난다. 귀로 듣는 역사 이야기였던 ‘격동 50년’. 지금은 세간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라디오 드라마와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은 역사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관점에서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이를테면 격동 50년이 귀로 듣는 역사였다면 이용재가 쓴 책은 ‘눈으로 보는 격동 50년’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시야를 조금 더 좁혀 들어가자면 건축역사의 50년 정도쯤 될 수 있을까.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강조되어 있듯이 이번 책은 이용재식 글쓰기의 재미를 느껴보는 데 좋은 기회였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법적으로 오류의 문장이다. 극단적으로 짧게 잘린 문장도 도드라진다. 그의 책 뒷면에 실렸던 ‘파격적인 문장’ 이란 수식어는 좀 과장된 이미지가 슬몃 들어가긴 했어도, 다분히 한 세계에 안주하지 않은 이단아적인 풍미를 풍기는 듯한 이용재식 글의 성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스스로가 건축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쟁이의 삶을 추종하며 건축과 작가라는 또는 택시기사의 삶 사이에서 이리저리 줄다리기를 하는 삶을 살아왔던 저자만의 시간이, 글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생각의 틀로 구성되어 독자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은 ‘궁극의 문화기행2’이라는 제목아래 ‘건축가 김원 편’이라는 소제목을 동행하고 있다.

어쩌면 이번 책은 저자 이용재가 ‘글 쓰는 건축가’? 라는 동맹으로 알게 된 인생 스승이자 선배인 김원에게 바치는 지고지순한 순애보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정나미 없이 뻗대며 ‘아니면 말구’식의 콧방귀를 끼고 돌아설 것 같은 이용재, 사실 김원의 영원한 팬이 분명하지 않을까.




김원이라는 건축가를 통해 들여다본 대한민국의 건축역사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당대의 정치 경제적 비화와 더불어 성장해왔다는 인식을 받게 된다. 어림잡아 60-70년대를 시작으로 거센 정치적 외압과 실용성만을 강조해왔던 낡은 건축의 의미지를, 예술의 한 경지로 끌어올리려 했던 건축쟁이들의 진실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는 데 주목할 만하다.

 

책은 실제로 김원이 작업했던 건물들을 찾아가며 각각의 에피소드와 건축물들의 정보를 싣고 있다. 문화시설, 교육시설, 주거 업무시설, 종교시설, 못다한 김원 이야기로 목차와 내용을 구분하고 있는 책은 각각의 장마다 독자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선다는 메리트를 지닌 듯하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압권은 어쩌면 종교시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주교 신자인 김원을 의식한 까닭일수도 있고, 김원이 천주교 관련 건축에 많이 관계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천주교 박해 관련 사적지를 소개하는 동시에 성당 건축과 관련한 스토리를 이어 쓰고 있다.




저자 이용재의 현란한 말재주와 다소 도발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한 글쓰기식의 흐름에 지배를 당하고 만 결과일까. 책을 덮고나서 역시 건축은 실용성을 가슴에 품은 채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를 두르라 하지 않았던가.

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신앙심은 오래전 고딕양식의 뾰족한 탑을 완성했다. 고딕양식의 뼈대를 물려받은 많은 건축물들과 함께 김원이 작업했던 어느 성당의 외벽을 생각한다. 끝날 기미조차 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성당 외벽의 계단이 갖는 상징성은 건축이 예술로 재탄생하고 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어진다.




실용성과 예술성의 적절한 조화가 어우러지는 건축문화의 이상을 현실로 끌어올리는데 청춘을 고스란히 반납한 어느 노교수의 이야기가 이용재식 표현을 만나 차가우면서도 진솔하다.




해도 좋고, 바람조차 부드러운 날이다. 책장마다 정성스럽게 실린 사진을 토대로

상춘객의 기분을 빌려와 잠시 떠나고도 싶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흔 아홉 번째 서평.

7년의 밤-정유정




어떤 선택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라는 말을 상기한다. 음식을 먹는 일에서나, 옷을 입는 일도 그렇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 직장을 구하는 일, 가정을 꾸리는 일 조차도 일정부분의 환경의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기실 이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오로지 선택이라는 택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일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딴은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늘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 취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무엇일까.

어쩌면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의 밝고 어둠을 보이는 명암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가 갖는 ‘의지의 개입’ 여부이다. 내가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이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그 무엇에 의한 선택인가, 라는 명제는 작가 정유정의 최근작 ‘7년의 밤’ 속에서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독자에게 질문으로 다가선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답안지 한켠을 비스듬히 펼쳐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가 내보이는 답지를 인정하는 가에 대한 선택은, 물론 독자에게 남겨진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소설은 스케일이 큰 방면에 구성과 짜임이 조밀하게 들어차 있다. 방대한 이야기를 끌어감에 있어 구성의 탄탄함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안정감을 주는 좋은 한 예일 것이다.

마치 일정한 구획을 나누며 일목요연하게 모양과 틀을 갖춘 거대 거미의 집을 연상케 한다. 한동안 실존주의 영향의 소설에 집착했던 나는 정유정의 소설을 읽으면서 묘하게도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져들었다. 이를테면 이 소설은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드러내려는 데 의도는 갖추었으되, 뭐랄까 작품 속에서 등장하듯 수심 저 깊은 곳까지, 아주 깊은 그곳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깊이로만 들어가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곤 했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 실존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작품을 완성시켰다. 적당한 버무림이란 표현이 조금 걸리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게 정의를 내리는가 싶다.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미지들이 살아있는 인물들의 묘사, 사건의 흐름과 시점의 변화, 박동감이 느껴지듯 빠른 유속과 같은 서사적 흐름을 보이는 책은 강한 흡입력을 지녔다. 이를테면 눈 깜짝 할 순간에 많은 화면들이 보였다 사라지는 듯한 스릴러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책 속에는 선과 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이 각자의 삶에 있어 한 두 번쯤 의도되지 않은 선택을 취하듯, 책이 선과 악이라는 흑백논리 앞에서 선도 악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로 자신을 몰아가는 인물 케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놓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는 흑과 백처럼 나누어지는 것일지라도 현실적 상황에 따라 양단의 두 가지 성향을 함께 지닌 야누스적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작가적 의도를 구축한 것은 아닌가,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최현수 그는 전직 야구선수였으며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남자다. 그는 우리가 획일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사고로 세상에 만들어놓은 선택의 경계선상에서 고통 받으며 고민하는 인물이다. 반면 또다른 주인공인 오영제는 고민할 것 없이 어둠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명 주목해야 할 인물 최현수의 아들 최서원이 있다.




작가는 사건과 사건을 재배치함에 있어, 그 연계성을 끌고가는 치밀함을 시종일관 잃지 않는다. 소설 ‘7년의 밤’이 갖는 장점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부분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집요함, 치밀함,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의 안전성. 하지만 어느 때 나는 약간 삐딱선의 의식을 잡곤 했다. 조금은 산만하지 않은가, 조금은 정신이 없지 않은가. 빠른 유속 밑에 깔린 안정감이 이따금 흔들리는 게 보일 때도 있었다.

결말부위에서 작가의 자세한 설명이 담긴 대목이 없다고 해도 모나지 않을 듯했다. 작가는 너무 친절한 결말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하면서도 달리 어떤 결말을 기대했던 것인가, 라는 불온한 자문자답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신바람나게 재미가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통해 작가는 작가적 고충을 토로한다. 어쩌면 책 속에서 혹 독자가 읽어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부지런히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작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작가 정유정이 마지막에 인용한 글을 옮겨보자.

“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이쯤에서 개인적인 대답을 정리해야 할듯하다. 예스 혹은 노우.....

매순간 삶이 던지는 거룩한 선택의 기로에서, 꼬물닥거리며 주저하는 인간들 속에 껴있는 사람이 혹 내가 아닌가, 들여다보는 일은 씁쓸한 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마흔 여덟 번째 서평

 네 번째 빙하기-오기와라 히로시




가볍지 않은 유쾌함의 진수

(난 나일뿐이다)




 호두나무를 직접 본적이 없다. 연애시절 남편이 고향에서 가져왔던 호두나무의 열매는 뜻밖에도 갈색이 아닌 초록에 흠씬 물들었던 동그스름한 열매였다. 거짓말 이라고 했던 내게 그는 내가 도시에 사는 촌사람이라는 말을 했었다. 사실은 이랬다. 초록의 껍질을 벗겨내야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불구불한 뇌조식을 닮은 그 단단한 호두의 껍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게 직접 딴 호두를 건네주고 싶은 마음에 밤새도록 식구들 모르게 초록의 생으로 날것이었던 호두의 겉껍질을 벗겨냈다고 했다. 손톱 끝마다 물감 때가 낀 것처럼 물이 들었던 손가락들이 어렴풋하게 생각이 난다.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 목말라하는 꼭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이 되는 일도,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도 역시 한명의 인간개체가 완성되어가기까지 인간은 내외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호두의 껍질 하나를 다 벗겨내는 일조차 나름의 열정과 시간과 고뇌가 필요로 하는 법칙임에는 분명한 일이다. 이쯤되서 거창하게도 새와 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일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아니면 ‘갈매기 조나단’이나 ‘수레바퀴 아래에서’처럼 무언가 교훈적이고 감동적이며 되게 반죽된 빵 반죽처럼 끈끈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네 번째 빙하기는 때때로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것들의 여부를 떠나 소유하고 있는 일정부분의 선입관과 고정된 인식의 틀을 스스럼없이 잘금잘금 깎아내리다가 종단에는 시원스럽게 무너뜨리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엄밀하게 보면 자아를 찾아가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다. 그렇긴 한데 딱딱하다거나 너무 고무적인 까닭에 지루하다거나 무겁지는 않다.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시종일관 귓등에서는 아침마다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이 산뜻하기까지 하다. 그런까닭에 소설은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충분하고도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주인공 와타루.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혼혈아다. 주변인들과는 다른 생김새 때문에 자아존재감에 끊임없는 의구심을 갖는 소년은 옛날 옛적에 살았다던 크로마뇽인을 통해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는 모델링을 찾게 된다. 이는 희극인 동시에 비극적 요소를 동시에 갖는 대목이다. 네 번째 빙하기가 갖는 진정한 힘은, 양극단의 감정을 적절하게 융화하며 풀어가는 데 있다.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우울과 슬픔을 건너뛰어 차라리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코믹함으로 역설되는 듯하다. 현실에서의 부재를 엉뚱하게도 얼음 속에서 드러난 채, 사람들의 호기심을 받으며 유리관 속에 갇혀 있다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삼는 소년. 그래서 주인공 와타루는 결코 가볍지 않은 유쾌함을 지녔다. 스스로 자신이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는 사고에 몰입한 나머지 초등학교의 시절들을 크로마뇽인의 생활 따라잡기 놀이를 하고 보낼 정도로..

 

 ‘우가우가우가’

 알 수 없는 괴성의 언어를 외치며 드넓은 초원을 또는 설원을 뛰어다녔을 어느 크로마뇽인을 생각한다. 무한의 시간 저편에서 숨 쉬는 인류의 조상 크로마뇽인을 아버지로 둔 소년은 현실이라는 문 앞에서 철저하게 작은 이방인으로 그 존재감이 분리되고 만다. 그것은 나와 같지 않다는 독특함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점철된다. 소년의 자아는 계속해서 넘어지면서도 정말이지 기특하게도 오뚝이처럼 분연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시선을 털고 일어선다. 그 스스로가 가장 자신 있고 사랑하며 아끼는 ‘창’을 힘껏 내던지듯이. 유연한 포물선을 그으며 목표로 했던 한 곳에 언젠가는 내리꽂히는 그의 창은, 어쩌면 와타루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상징물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사망 후 주인공 와타루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로 떠난다. 그는 현실에서의 아버지를 만나는 동시에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었던 자신을 계속해서 믿어주고 이끌어주며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그만의 크로마뇽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소년은 더 이상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 속에서도 눈물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화는 그의 내적인 성장의 결과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다소 두툼한 책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무게감으로 인해 내 환심을 샀다. ‘네 번째 빙하기’ 라는 제목은 상징적인 것이어서 여러 의미를 갖는 듯하지만 네 번째 빙하기를 견뎌낸 크로마뇽인과, 차갑고 고즈넉한 자신만의 빙하기를 지금 막 건너가고 있는 소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치는 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삶의 소중한 한 순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견뎌낼 수밖에 없지만 견뎌냄과 동시에 삶에 있어 새로운 세상과 맞닿아 있는 각자의 빙하기의 존재를 찾기 마련이다 

혹한의 빙하기가 막 지난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문득 멀어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옛시절을 추억하며....

난 나일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