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마흔 여덟 번째 서평

 네 번째 빙하기-오기와라 히로시




가볍지 않은 유쾌함의 진수

(난 나일뿐이다)




 호두나무를 직접 본적이 없다. 연애시절 남편이 고향에서 가져왔던 호두나무의 열매는 뜻밖에도 갈색이 아닌 초록에 흠씬 물들었던 동그스름한 열매였다. 거짓말 이라고 했던 내게 그는 내가 도시에 사는 촌사람이라는 말을 했었다. 사실은 이랬다. 초록의 껍질을 벗겨내야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불구불한 뇌조식을 닮은 그 단단한 호두의 껍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게 직접 딴 호두를 건네주고 싶은 마음에 밤새도록 식구들 모르게 초록의 생으로 날것이었던 호두의 겉껍질을 벗겨냈다고 했다. 손톱 끝마다 물감 때가 낀 것처럼 물이 들었던 손가락들이 어렴풋하게 생각이 난다.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 목말라하는 꼭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이 되는 일도,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도 역시 한명의 인간개체가 완성되어가기까지 인간은 내외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호두의 껍질 하나를 다 벗겨내는 일조차 나름의 열정과 시간과 고뇌가 필요로 하는 법칙임에는 분명한 일이다. 이쯤되서 거창하게도 새와 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일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아니면 ‘갈매기 조나단’이나 ‘수레바퀴 아래에서’처럼 무언가 교훈적이고 감동적이며 되게 반죽된 빵 반죽처럼 끈끈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네 번째 빙하기는 때때로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것들의 여부를 떠나 소유하고 있는 일정부분의 선입관과 고정된 인식의 틀을 스스럼없이 잘금잘금 깎아내리다가 종단에는 시원스럽게 무너뜨리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엄밀하게 보면 자아를 찾아가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다. 그렇긴 한데 딱딱하다거나 너무 고무적인 까닭에 지루하다거나 무겁지는 않다.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시종일관 귓등에서는 아침마다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이 산뜻하기까지 하다. 그런까닭에 소설은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충분하고도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주인공 와타루.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혼혈아다. 주변인들과는 다른 생김새 때문에 자아존재감에 끊임없는 의구심을 갖는 소년은 옛날 옛적에 살았다던 크로마뇽인을 통해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는 모델링을 찾게 된다. 이는 희극인 동시에 비극적 요소를 동시에 갖는 대목이다. 네 번째 빙하기가 갖는 진정한 힘은, 양극단의 감정을 적절하게 융화하며 풀어가는 데 있다.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우울과 슬픔을 건너뛰어 차라리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코믹함으로 역설되는 듯하다. 현실에서의 부재를 엉뚱하게도 얼음 속에서 드러난 채, 사람들의 호기심을 받으며 유리관 속에 갇혀 있다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삼는 소년. 그래서 주인공 와타루는 결코 가볍지 않은 유쾌함을 지녔다. 스스로 자신이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는 사고에 몰입한 나머지 초등학교의 시절들을 크로마뇽인의 생활 따라잡기 놀이를 하고 보낼 정도로..

 

 ‘우가우가우가’

 알 수 없는 괴성의 언어를 외치며 드넓은 초원을 또는 설원을 뛰어다녔을 어느 크로마뇽인을 생각한다. 무한의 시간 저편에서 숨 쉬는 인류의 조상 크로마뇽인을 아버지로 둔 소년은 현실이라는 문 앞에서 철저하게 작은 이방인으로 그 존재감이 분리되고 만다. 그것은 나와 같지 않다는 독특함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점철된다. 소년의 자아는 계속해서 넘어지면서도 정말이지 기특하게도 오뚝이처럼 분연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시선을 털고 일어선다. 그 스스로가 가장 자신 있고 사랑하며 아끼는 ‘창’을 힘껏 내던지듯이. 유연한 포물선을 그으며 목표로 했던 한 곳에 언젠가는 내리꽂히는 그의 창은, 어쩌면 와타루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상징물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사망 후 주인공 와타루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로 떠난다. 그는 현실에서의 아버지를 만나는 동시에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었던 자신을 계속해서 믿어주고 이끌어주며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그만의 크로마뇽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소년은 더 이상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 속에서도 눈물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화는 그의 내적인 성장의 결과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다소 두툼한 책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무게감으로 인해 내 환심을 샀다. ‘네 번째 빙하기’ 라는 제목은 상징적인 것이어서 여러 의미를 갖는 듯하지만 네 번째 빙하기를 견뎌낸 크로마뇽인과, 차갑고 고즈넉한 자신만의 빙하기를 지금 막 건너가고 있는 소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치는 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삶의 소중한 한 순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견뎌낼 수밖에 없지만 견뎌냄과 동시에 삶에 있어 새로운 세상과 맞닿아 있는 각자의 빙하기의 존재를 찾기 마련이다 

혹한의 빙하기가 막 지난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문득 멀어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옛시절을 추억하며....

난 나일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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