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도 - 이해인 시집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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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일흔 두 번째 서평

작은 기도-이해인 시집




이제는 거울 앞에서...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비를 만나는 일은 일상이지만, 유독 가을에 내리는 비만큼은 느낌이 다르다. 가을에 제격인 것이 또 뭐가 있을까.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접하면서 비와 더불어 가을에 잘 어울리는 것은 어쩌면 시집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잠긴다.

와병 중에 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접한 걸 기억한다. 시집을 보고 시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녀의 시집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수필집을 통해 인연을 만들고 나서 시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떤 사유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뭐랄까 한때 나는 치열한 의식이 깔린 실존과 이데아가 품어내는 그림자에 심취했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속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좌절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모든 순간순간의 모습을 쫒으며 공감하기를 좋아했었던가. 참 무겁고, 냉정하고, 치열했으나 그들 모두가 상처받았고 힘들어하는 과정에서 창작된 작품을 좋아했나보다.




이제는 거울 앞에 서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문득 서정주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거울 앞에 선 누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느낌이 새록새록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세상살이의 고단함에 한없이 돌고 돌아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긍하는 존재. 자아를 투영하는 깨끗한 거울을 통해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해인 수녀의 시집의 느낌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마흔을 조금씩 숫자로 헤아리며 기다리면서,  마흔이 넘어가면 시를 쓰기에는 감수성이 떨어진다 했던, 어느 교수의 말을 한쪽 가슴이 시리게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이 차마 어려운 일이라 한다면 시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통해, 부단하게 어지러웠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각자의 거울 앞에 서 볼 수는 있지 않은가.

순수했지만 조금은 아리고 쓰라렸다면 상처로 남았을 시간을 뒤로 한 채, 시인 서정주가 그랬고, 구도자인 동시에 시인인 이해인이 그러했듯이 시를 읽는 이들이 저마다 각자의 자아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녀의 시는 순수하고, 순진하며, 곱다. 참 곱다. 겉치레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표현으로  예쁘게 시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 대해여, 별과 달에 대하여, 화병에 꽂아둔 꽃들과 들판에 이름 모를 작은 풀들에 대하여, 이른 아침 창가에서 지저귀는 새들에 대하여, 바닷가에 일렁이는 파도에 까지 시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전체적으로 기쁨과 만족 행복감 속에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인간적인 고뇌와 불안감을 엿보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죽음과 마지막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담대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평생을 신께 의지하고, 믿음으로 지켜왔을지라 하더라도, 예수가 그의 아버지께 가능하다면 그 순간을 비껴가게 해달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싶다. 그러나 이해인 수녀가 내보이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슬프거나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다만 육신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현실에서의 인간적인 고충이 드러남에 시를 읽는 동안 마음이 숙연지더란 말이다.




신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게.....




시집에는 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사랑이,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여러 모습과 비밀스럽고도 내밀한 감정들이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잔잔한 미풍의 향연처럼 그렇게 누구에게나 좋은 느낌으로 다가설 듯한 시집이다. 가을에는 시집 한권 선물하면 참 좋겠다.

끝으로 이해인 수녀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많은 시들 중에서도 이를테면 아주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시 하나를 적어본다. 삶의 모든 것이 기도이며 고해성사였던 이에게는 타인으로 행했던 모든 사랑마저도, 딴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스스로의 힘겨운 자의식의 발로였음을 고백하는 듯하다.




어떤 후회




물건이든

마음이든

무조건 주는 걸 좋아했고

남에게 주는 기쁨 모여야만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느 날 곰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더라구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 습성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함을

부끄럽게 깨달았어




주는 일에 숨어 따르는

허영과 자만심을

경계하라던 그대의 말을

다시 기억했어




남을 떠먹이는 일에

밤낮으로 바쁘기 전에

자신도 떠먹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지녀야 한다던 그대의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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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별로 배우는 통합형 세계사 교과서 1 통합형 세계사 교과서 1
알렉스 울프 지음, 김민수 옮김 / 빅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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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일흔 한번 째 서평




테마별로 배우는 “통합형 세계사 교과서”




다시 만나는 세계사 이야기




코 묻은 손수건을 가슴에 붙이고, 동그란 빵떡모자를 눌러 쓰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 초기 그 즈음에는 동네에 외국인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낯선 이방인들의 모습이 보일라치면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뒷걸음쳐 모여서는 경계의 눈빛으로 노려보곤 했다. 노랑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보면 다들 하는 말이 미국사람이다, 라고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 미국사람이다, 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대꾸들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난 미국사람 아니에요.

에잇 거짓말. 코쟁이도 거짓말을 하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외에는 전부 미국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나보다. 하지만 진실은 꼬맹이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미국사람이 아니라고 끝까지 항변을 하던 그 외국인은 난 영국 사람입니다, 라고 했던 것 같다.




세계는 넓고 그들의 삶이 그려왔던 역사는 짐짓 시간 앞에서 길고도 농후한 깊이감으로 다가온다. 세계사를 한눈에 읽기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아는 세계라고는 미국 밖에 없다, 라고 단정 지었던 그 시절이 단순한 세계에 갇혀있는 모순감이 있긴 했어도 외우고 생각하는 데는 쉽지 않았던가, 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한다.

책 제목이 딴은 매혹적이다. “테마별로 배우는 통합형 세계사 교과서” 란다. 구체적으로 어떤 테마를 선정해서 구분하고 다시 분류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새로운 틀 안에서 다시 풀어가고 있다는 데 빨리 읽고 싶은 조바심이 생겼던 것 같다.

책은 전체 2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첫 번째 책은 선사시대에서 중세시대까지, 두 번째 책은 근세 시대에서 근, 현대 시대까지의 내용을 담는다.

부재에서 나왔던 하나의 어휘를 책 한권이 끝날 때까지 줄곧 잡고 있었다. 그것은 ‘테마’ 였다. 어떤 테마를 어떻게 풀어갔을까. 이미 기존의 세계사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의 전개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나고 싶었던 게 분명했기에 처음부터 테마에 집착이 과했던 것 같다.




첫인상은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그저 알맞았다. 책은 기존의 것들을 밑바탕에 깔고 출발한다. 영원불멸의 법칙인가. 인류의 최초 조상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이동하였으며,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국가라는 하나의 틀을 소개하는 것 역시 기존의 것과 다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선사시대와 고대시대 그리고 고전시대의 구분도 사실은 조금은 더 명확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세 가지의 시대를 구분했다는 것만으로 테마를 한정지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번 세계사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에 없이 새롭게 느꼈던 것은, 어쩌면 문명의 발생지에 저자가 더 오래 시선을 두고, 조금은 더 많이 생각을 하면서 책을 썼던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이다. 보통은 그저 한번 눈으로 보고 지나갈 정도의 문명의 발생지를 논한다고 할 때, 이번 책은 이 부분에 중심 가지를 두고 점차 범위를 주위로 뻗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때문에 뭐랄까, 단순하게 연대기적으로 순열을 정리하기 보다는, 그때의 중심적인 사건(사건이라는 표현이 좀 거슬린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점이 될 만한 순간이라고 해두자)을 기점으로 해서 시선을 옮겨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테마’로 보는 세계사인가.




전반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 서술을 기본바탕으로 하면서, 주목할 만한 사항들을 중심으로 쉽게 말하자면 사건중심으로 풀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테마’에 집착하는 내게 책은 조금은 더 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세계사에서 기록할만한 사건과 사건들을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라와 나라의 흥망성쇠, 영웅의 이야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서로 부딪히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 본성의 모습들이 한권에 담겼다. 어쩌면 이다지도 많은 나라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서로들 이렇게도 많은 다툼 속에서 세대와 세대가 이어져 왔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책은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세계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릴적 배웠던 교과서보다도 더 많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교과서로 하기에는 학생들이 고충이 많지 않을까 싶고, 다만 세계사를 이해하는데 용이하게 쓰일 어렵지 않은 책으로 알차게 품어볼 요량이다.

연대표를 활용해 길게 풀어서 서술해간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편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사실은 기원전과 기원후가 뒤섞여 있어 그 부분에는 조금 더 세심한 정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세계사라는 책 한권을 읽으면서 한국, 우리 땅에 대한 이야기는 단 두 번 등장하고 있다는 실정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종교에 관련해 귀퉁이에 아주 작게, 또는 중세시대 끄트머리에 한국과 일본이라는 타이틀로 소심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더군다나 후삼국의 통일과 고려시기에 있어 저자는 “한국엔 한동안 통치자가 없는 공백 상태가 이어진다” 라는 표현을 썼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인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당시 고려의 임금이 아예 없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마음에 걸려 인터넷을 뒤져 고려사를 다 찾아봤다.

또한 세종에 대한 언급은 단 한줄도 하지 않고 고려를 세운 이성계만 소개하면서, 사진은 이성계가 아닌 세종의 사진을 실은 것도 작게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볼 때,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책 한권에 실린 내용이 전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가, 라는 불안증이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한다. 내가 꼬투리를 또 하나 잡은 셈인가.

사실 다른 세계사 이야기는 그렇게 꼬집어 딴지를 걸만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은 날이 선 시선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이것이 외국인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에 존재하는 한국의 위치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생각이 많아지는 것까지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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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파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들 - 인생의 크고 작은 상처에 대처하는 법
안드레아스 잘허 지음, 장혜경 옮김 / 살림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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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번째 서평

내가 아파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들-안드레아스 잘허




내 상처와 마주보기.




대학 마지막 학기 중에는 쉽게 공부를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스산한 바람이 시치미를 떼고 섣불리 불온한 기운을 몰아와 교정 뒤뜰에 있는 나무의 옷을 모조리 벗겨버리고 어느날 밤에는 가는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흐느적거리게 제 짝도 아닌 나무 곁에 올려놓았던 그 즈음, 나는 나보다도 나이 어린 동기생과 같이 해가 지고 있던 종로거리를 말 그대로 싸돌아다녔다.

그녀는 지난번 사주카페에서 사주를 봤다고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낯선 두려움 때문에 그 계절에 불어오는 바람조차 편히 맞아줄 아량을 준비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리가 미래의 시간을 미리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 한권을 보고나서 그 생각들이 바뀌는가 싶다.

앞날이 어떤 빛깔로 내 앞에 설지, 그것이 푸른빛일지 아니면 어두운 빛일지 두려운 것은 어쩌면 현재의 자아가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들이 저희들끼리 줄을 맞춰 정리라는 것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종단에는 현재의 것들이 질척이는 옛 시간의 것들을 들춰낸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좁으면 한없이 좁고 딴은 넓다면 방대한 우리 은하의 크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드넓은 한 세상에서 모든 것이 공존하는 것은 아닐까.




한때 내가 불안했던 것은 오래전 어떤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어떤 기억을 상처라 말한다. 모든 인간은 상처로부터 태어나, 상처로부터 단련되는 과정에서 성장이라는 것을 하고, 평생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는가보다. 하지만 저자 안드레아스 잘허의 이야기처럼 상처는 그 사람을 나락으로 주저앉게 하기도 하고, 다시 의연하게 일어서게도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진리를 믿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불편한 진실이 이 책에도 적용되는가 보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의도하지 않은 어느 순간조차도 상처에 무방비로 설수 밖에 없다는 현실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선택이 가져오는 불편한 진실은, 어쩌면 늘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것들이 몰고 오는 파장의 의해 삶의 무게가치가 흑백으로 갈리며 또는 큰 너울에 휩쓸리기까지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개인의 치열하고 강한 의지가 아닐까.

누구나 받는 상처 앞에서 똑같이 좌절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크든 작든, 깊은 상처이든 아니든 간에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게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라고 책이 말하고 있다.

  

저자는 어린아이로 대표되는 시절의 유아기 시절부터, 성년이 되어 이성과의 관계를 다룬 부부에 대하여, 노인들의 문제까지 각각의 시기에 인간이 마주치는 다양한 상처의 예를 소개하며 함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모두 세 파트로 나뉘는데 ‘무엇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가?’ 이것이 첫 번째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떻게 상처를 다룰 것인가?’ 세 번째 마지막 이야기는 ‘나와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기술’이라는 소제목 아래 결코 가볍지 않은, 또 설쳐대지 않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어떻게 상처를 다룰 것인가?’에서 저자는 영웅의 이야기를 빌려와 이해도를 높이는 노력을 한다. 다양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상처를 받아들이고 극복해내는지를 소개하며, 이를 다시 영화 밖 사람들의 현실 속으로 가져온다. 영웅도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주저하고, 좌절하며, 멘토를 만나 용기를 얻고 위험을 극복해 간다는 이야기는 그 스토리가 유명세를 떨쳤던 영화라는 이유만으로도 친근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공식화된 스토리에서조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찾아 건져 올린다.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하고 상처를 극복해 의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이 모험 가득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는, 한편으로 우리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축소해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며,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결코 상처 속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닫지 말 것이다. 당당하게 현실로 걸어 나와 나를 인정하고 내가 받은 상처를 인정하는 것, 그래서 상처위에 새살이 돋아나듯 더 든든한 자아를 만들어가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책 ‘내가 아파보기 전에는 절대 몰랐던 것들’의 부드럽지만 강한 메시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그날 결국 나는 온전한 나의 신과 잠시 타협을 하기로 하고 사주카페에 가 사주를 봤다. 하지만 그다지 신통치도 않은 사주였고, 열심히 봐주지도 않는 눈치여서 동기와 같이 심드렁한 기분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대로변에는 한참 공사를 진행하는 건물들과 무언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판들이 차도까지 널브러져있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기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그 당시 내가 서 있던 ‘현재’ 라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나는 상처를 인정하기 두려웠던가. 인정하고 상처의 문을 열어 나오기가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치열했던 이십대의 시간들이 지나고 난후 읽는 심리관련 책의 느낌은 또 다르다.

따뜻한 온기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의 의지가 될 수도 있을 법하다. 지금 누군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문을 걸어 잠그고 상처 한가운데 앉아 있다면, 냉냉한 정신과 의사와의 집요한 면담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이 잔잔한 위로로 다가오지 않을까.

가치를 주자면 주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부드럽고 유한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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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 조선 오백년 집권의 비밀
도현신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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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서적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예순 아홉 번째 서평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도현신




 세자와 임금 그리고 공부




조선의 임금은 어떤 공부를 하면서 성장했을까. 임금이라는 자리, 왕세자라는 자리는 분명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책에 대한 첫 호기심이며 이 호기심에서 생겨난 질문들이었다.

80년대 태생인 작가 도현신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 책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안에는 500여년을 존속시켜왔던 조선조 임금과 그들이 배우고 익힌 ‘공부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옛날 엘리트들은 무얼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한 설명쯤 될 수 있을까.

1부와 2부에서는 각각 서연과 경연에 대해 소개하는데 세자시절의 익혔던 공부에 관한 것이 바로 서연이며, 임금이 되고 난 후의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을 경연이라 지칭하고 있다.

서연이나 경연은 크게 차이를 갖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에 받는 교육과정과, 성인이 되고 임금이 된 이후의 교육과정의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세상 이치와 맞물리는 듯한 느낌이다.




먼저 서연을 들여다보면 작가가 예로 들었던 영조와 정조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데, 내용인 즉 상왕과 스승의 관계에서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고, 유교경전을 탐독하며 하는 학문적 교수법이 주로 행해졌다. 그렇다면 임금의 옥좌에 앉은 후에 교육과정이었던 경연은 어땠을까. 경연에서는 거대하고 확고한 통치개념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된다. 실제로 경연이라는 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들과의 조화와 타협의 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경연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면에서 활용과 응용이라는 수를 적용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깊이감 있는 교수과정이 중요시 됐다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끼 밥 먹는 일 빼고 점심이후 막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잠들기 직전까지 말 그대로 빽빽한 일정을 견뎌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듯싶다. 학문하는 과정에서 중간중간에 보는 시험의 중압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걸 보면 세자가 되는 일도, 임금이 되는 일도 결코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부하기 싫으면 임금 자리도 내놓아야 할 판이다.

각설하고 책은 한 명의 어린 세자가 어엿한 한 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학문은 비단 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육체적 단련의 과정 또한 포함한다는 데 주목할 부분인 듯하다.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며, 활을 쏘는 것 역시 공부의 한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의 바람직한 임금상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는 욕심이 많은, 욕심이 많아야 주변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피곤한 일상을 살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측은함이 몰려든다.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관련 도서를 접할 때마다 늘 고심하고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까닭은 노파심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오로지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기 어렵게 하는 많은 장치들이 책속에 들어있기에, 스스로 혼돈에 빠지지 않을까하는 소심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은 전통의 역사책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는다. 물론 그 담고 있는 내용면을 본다면 역사적 사료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딴지를 걸 구실은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저자 도현신의 현대사회와 역사를 비교하며 평가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데에서, 전형적인 역사서로 보지 않게 되는 듯하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형적인 역사서가 갖는 딱딱함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현실의 정치와 사회성을 접목시켜 비판하는 저자의 글쓰기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동안 역사서에서 느꼈던 진중한 느낌과는 다른 것과 마주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소개하는 양녕대군에게 동정표를 던진다. 이것을 역사관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만, 글쓴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주제를 잡아 글을 쓰는가에 따라 표현과 이 표현이 가져오는 이미지는 크게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서연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양녕대군에게 세자로서 서연에 임하는 점수를 각박하게 주고 있다. 그것이 물론 실록에 근본을 두고 객관적 사실에서 저술한 대목이겠으나, 양녕의 후손들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나이를 운운하는 것 또한 선입견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의 도전적 글쓰기가 지니는 에너지와 패기, 뜨거운 열정이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풀어내며, 그 여파가 어떤 식으로 퍼져나갈지 조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아닌이상, 과거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개개인마다 다른 생각과, 표현의 다양성은 존중해야 할 문제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문제가 아닐까, 라는 다소 유보적인 결론도 만들어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저자는 경연 부분에서 중종과 조광조의 이야기를 상당부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소개한다. 물론 주제에 맞게 다른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중종과 조광조의 일화가 아닌가 말이다. 이쯤되면 책은 ‘중종실록에서 본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이라는 제목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라는 딴지 하나를 걸고 넘어가려 한다.

중종실록의 인용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제목이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이라 했을 때는, 서연과 경연을 많이 참여했던 일부 왕들의 일화에 국한되지 않은 전반적인 조선조 왕의 기록들을 실어줬어야 하지 않았나, 라는 욕심을 갖는다. 사실 중종과 조광조의 경연 부분에서는 뒤로 갈수록 중복되는 내용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비단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저자는 책 뒷부분에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록’을 싣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짧거나 혹은 길게 소개되는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앞서서 보지 못했던, 조선의 다른 임금들의 면모를 짧게나마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더 많은 임금의 경연을 소개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에 대한 보상이지 않을까. 제목 때문에라도 빠지면 서운 했을 법한 왕족의 교육기관인 종학 이야기도 살짝 지면을 따라와 있다.




미주알 고주알 삐딱하게 잔소리를 했지만, 조광조가 중종에게 올렸던 진정한 충신의 발언들은 학문을 배운다는 고정된 틀을 벗어나 인간관계에 있어, 나라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있어, 총체적인 삶의 진리를 가르치는 명언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도 수신이 중요하다. 수신이 자리를 잡아야 학문이 설 자리가 있는가보다. 어찌 그것이 임금에 오를 세자에게만 국한된 일일까. 집이 떠나가라 악을 쓰는 우리집 악동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참된 교육이란 멀고도 어려운 여정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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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 이성아 소설집
이성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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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예순 여덟 번째 서평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이성아




누구나 우연처럼 태풍을 만난다




등단여부를 떠나 문학 작품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일이 까마득하게 옛날 일이 된듯하다. 작품의 주제와 더불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주변환경의 설정이 이뤄내는 조화, 작품이 품고 있는 문학성까지 하나하나 뜯어보고, 찢어도 보고, 머리 터지게 싸움하듯 고민하던 순간을 다시 맞닥뜨려야 할지 잠시 망설인다. 문장표현과 이어지는 문단까지 이를테면 수학이나 물리학의 공식으로 돌변해 사진처럼 찍히듯 들어오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있는 듯하다. 소설집 한권을 들고 생각이 늘어지고 있으니.




많은 생각들은 처음부터 생겨났던 것 같다. 그리고 이성아, 그녀의 소실집 한권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생각은 이어졌다. 오래도록 잊고 또는 잃어버리고 살았던 감각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책을 읽어내는 내 시선을 흐리게 한다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그 갈증의 일부를 책에 실린 문학평론가 ‘장성규’의 해설을 통해 풀어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장성규가 말하는 작가 이성아의 작품세계에 모두 공감을 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형체가 잡히지 않았던 그림들이 자리를 잡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성아의 소설집은 여성에 관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소설작품이다. 작가도 여성이며, 글 속에 주인공들도 거의 대부분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 ‘여성성’을 강조한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장성규는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의 이론’을 가져와 풀어간다. 오이디푸스 이론의 한 중심이 아닌 그 외곽의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책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혼을 하고, 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뎌내며, 온전한 가정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외도라는 차가운 시선 한복판에 서기도 하고, 가정이 있는 이들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떠나는 비밀스런 밀월여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성규는 이러한 스토리를 한마디로,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어온 문학적 행태에 반기를 드는 용감한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의 이론이 작용해온 가부장적 배경의 글쓰기에 반기를 드는 글쓰기라는 말이다. 그의 해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눈으로 읽어내린 이성아의 글들을 천천히 느긋하게 떠올려보곤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전통의 가치관으로 여겨왔던 순종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해설을 읽고 나면 어느정도 이 소설집이 지니는 주제의식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왜 해설에 이다지도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지루한 감을 접했고, 반복되는 서간체 형식의 글쓰기와, 결말부분에서 여러번 느껴지는 허전함 때문에 쉽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단편을 한편씩 떼어 보면 괜찮겠지만, 여러편의 단편을 몰아서 읽다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분위기에 단조로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딴은 이것이 이 작가만의 개성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또 다른 생각도 이어진다.

다만 소설을 통해 소설의 주제와 현대사회의 모순된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갖는 허무와 어떤 동경 내지는 이상의 상관관계를 굳이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고 중얼거린다. 그러기에는 소설 읽는 감각이 너무 무뎌지고, 그런 까닭에 혼자 독설을 내뱉으며 횡설수설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제목을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라고 정했다. 그녀가 말하는 태풍은 어쩌면 장성규의 이론, 오이디푸스 이론의 외곽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했던 것으로부터의 다른 이질감, 그것이 품어내는 생경스런 감촉과 느낌들. 그리고 낯선 어떤 것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 나는 이 모든 감정의 주머니를 작가가 그려내려 애썼던 태풍이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성아의 소설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무게감도 어느정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설이 갖는 무게감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만나 접하면서, 우리는 내면에 숨어있을 법한 익숙하지 않은 다른 세계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재미나게 읽었던 작품은 ‘그물 치는 남자’, ‘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들은 장성규의 해설 가운데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재미나게 읽었던 작품들이 하나같이 장성규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이론의 외곽에서 시작된 글쓰기의 영역에서 살짝 비껴간 것일까. 내가 이 소설집을 읽는 과정에서 품었던 중심된 생각은 분명 장성규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그는 평론가이고 나는 일개 독자일 뿐.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를테면 길을 잃고 주저하며 고민하는 듯한 인물상보다 현실적이며, 생동감있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인물을 사랑하는가보다. ‘그물 치는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애착이 간다. 물론 ‘복순이’에 대한 이야기는 화자가 어린 여자아이라는 점과, 스토리의 절정에 이르는 소재가 기존에 문학작품에서 이미 보았을 법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톡톡 튀는 신선미는 다소 부족할지 모른다.




각설하고, 문학은 늘 재창조되는 것이라 믿는다. 혹자는 톨스토이 후의 창작되는 작품들은 모두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도 했다.

한 편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앓는 고충에 대해 말하길, 생니가 빠져나가는 고통이라 했던가. 원래 글을 쓰는 것보다 작품에 대해 왈가불가 이런저런 수다 떠는 일이 훨씬 수월한 일이다. 비할게 못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작가 이성아의 신작을 기다리고 싶어진다. 또다른 그녀만의 세계를 접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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