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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 조선 오백년 집권의 비밀
도현신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서적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예순 아홉 번째 서평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도현신
세자와 임금 그리고 공부
조선의 임금은 어떤 공부를 하면서 성장했을까. 임금이라는 자리, 왕세자라는 자리는 분명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책에 대한 첫 호기심이며 이 호기심에서 생겨난 질문들이었다.
80년대 태생인 작가 도현신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 책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안에는 500여년을 존속시켜왔던 조선조 임금과 그들이 배우고 익힌 ‘공부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옛날 엘리트들은 무얼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한 설명쯤 될 수 있을까.
1부와 2부에서는 각각 서연과 경연에 대해 소개하는데 세자시절의 익혔던 공부에 관한 것이 바로 서연이며, 임금이 되고 난 후의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을 경연이라 지칭하고 있다.
서연이나 경연은 크게 차이를 갖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에 받는 교육과정과, 성인이 되고 임금이 된 이후의 교육과정의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세상 이치와 맞물리는 듯한 느낌이다.
먼저 서연을 들여다보면 작가가 예로 들었던 영조와 정조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데, 내용인 즉 상왕과 스승의 관계에서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고, 유교경전을 탐독하며 하는 학문적 교수법이 주로 행해졌다. 그렇다면 임금의 옥좌에 앉은 후에 교육과정이었던 경연은 어땠을까. 경연에서는 거대하고 확고한 통치개념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된다. 실제로 경연이라는 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들과의 조화와 타협의 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경연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면에서 활용과 응용이라는 수를 적용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깊이감 있는 교수과정이 중요시 됐다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끼 밥 먹는 일 빼고 점심이후 막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잠들기 직전까지 말 그대로 빽빽한 일정을 견뎌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듯싶다. 학문하는 과정에서 중간중간에 보는 시험의 중압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걸 보면 세자가 되는 일도, 임금이 되는 일도 결코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부하기 싫으면 임금 자리도 내놓아야 할 판이다.
각설하고 책은 한 명의 어린 세자가 어엿한 한 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학문은 비단 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육체적 단련의 과정 또한 포함한다는 데 주목할 부분인 듯하다.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며, 활을 쏘는 것 역시 공부의 한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의 바람직한 임금상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는 욕심이 많은, 욕심이 많아야 주변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피곤한 일상을 살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측은함이 몰려든다.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관련 도서를 접할 때마다 늘 고심하고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까닭은 노파심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오로지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기 어렵게 하는 많은 장치들이 책속에 들어있기에, 스스로 혼돈에 빠지지 않을까하는 소심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은 전통의 역사책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는다. 물론 그 담고 있는 내용면을 본다면 역사적 사료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딴지를 걸 구실은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저자 도현신의 현대사회와 역사를 비교하며 평가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데에서, 전형적인 역사서로 보지 않게 되는 듯하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형적인 역사서가 갖는 딱딱함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현실의 정치와 사회성을 접목시켜 비판하는 저자의 글쓰기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동안 역사서에서 느꼈던 진중한 느낌과는 다른 것과 마주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소개하는 양녕대군에게 동정표를 던진다. 이것을 역사관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만, 글쓴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주제를 잡아 글을 쓰는가에 따라 표현과 이 표현이 가져오는 이미지는 크게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서연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양녕대군에게 세자로서 서연에 임하는 점수를 각박하게 주고 있다. 그것이 물론 실록에 근본을 두고 객관적 사실에서 저술한 대목이겠으나, 양녕의 후손들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나이를 운운하는 것 또한 선입견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의 도전적 글쓰기가 지니는 에너지와 패기, 뜨거운 열정이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풀어내며, 그 여파가 어떤 식으로 퍼져나갈지 조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아닌이상, 과거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개개인마다 다른 생각과, 표현의 다양성은 존중해야 할 문제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문제가 아닐까, 라는 다소 유보적인 결론도 만들어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저자는 경연 부분에서 중종과 조광조의 이야기를 상당부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소개한다. 물론 주제에 맞게 다른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중종과 조광조의 일화가 아닌가 말이다. 이쯤되면 책은 ‘중종실록에서 본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이라는 제목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라는 딴지 하나를 걸고 넘어가려 한다.
중종실록의 인용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제목이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이라 했을 때는, 서연과 경연을 많이 참여했던 일부 왕들의 일화에 국한되지 않은 전반적인 조선조 왕의 기록들을 실어줬어야 하지 않았나, 라는 욕심을 갖는다. 사실 중종과 조광조의 경연 부분에서는 뒤로 갈수록 중복되는 내용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비단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저자는 책 뒷부분에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록’을 싣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짧거나 혹은 길게 소개되는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앞서서 보지 못했던, 조선의 다른 임금들의 면모를 짧게나마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더 많은 임금의 경연을 소개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에 대한 보상이지 않을까. 제목 때문에라도 빠지면 서운 했을 법한 왕족의 교육기관인 종학 이야기도 살짝 지면을 따라와 있다.
미주알 고주알 삐딱하게 잔소리를 했지만, 조광조가 중종에게 올렸던 진정한 충신의 발언들은 학문을 배운다는 고정된 틀을 벗어나 인간관계에 있어, 나라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있어, 총체적인 삶의 진리를 가르치는 명언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도 수신이 중요하다. 수신이 자리를 잡아야 학문이 설 자리가 있는가보다. 어찌 그것이 임금에 오를 세자에게만 국한된 일일까. 집이 떠나가라 악을 쓰는 우리집 악동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참된 교육이란 멀고도 어려운 여정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