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 이성아 소설집
이성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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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예순 여덟 번째 서평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이성아




누구나 우연처럼 태풍을 만난다




등단여부를 떠나 문학 작품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일이 까마득하게 옛날 일이 된듯하다. 작품의 주제와 더불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주변환경의 설정이 이뤄내는 조화, 작품이 품고 있는 문학성까지 하나하나 뜯어보고, 찢어도 보고, 머리 터지게 싸움하듯 고민하던 순간을 다시 맞닥뜨려야 할지 잠시 망설인다. 문장표현과 이어지는 문단까지 이를테면 수학이나 물리학의 공식으로 돌변해 사진처럼 찍히듯 들어오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있는 듯하다. 소설집 한권을 들고 생각이 늘어지고 있으니.




많은 생각들은 처음부터 생겨났던 것 같다. 그리고 이성아, 그녀의 소실집 한권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생각은 이어졌다. 오래도록 잊고 또는 잃어버리고 살았던 감각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책을 읽어내는 내 시선을 흐리게 한다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그 갈증의 일부를 책에 실린 문학평론가 ‘장성규’의 해설을 통해 풀어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장성규가 말하는 작가 이성아의 작품세계에 모두 공감을 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형체가 잡히지 않았던 그림들이 자리를 잡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성아의 소설집은 여성에 관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소설작품이다. 작가도 여성이며, 글 속에 주인공들도 거의 대부분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 ‘여성성’을 강조한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장성규는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의 이론’을 가져와 풀어간다. 오이디푸스 이론의 한 중심이 아닌 그 외곽의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책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혼을 하고, 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뎌내며, 온전한 가정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외도라는 차가운 시선 한복판에 서기도 하고, 가정이 있는 이들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떠나는 비밀스런 밀월여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성규는 이러한 스토리를 한마디로,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어온 문학적 행태에 반기를 드는 용감한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의 이론이 작용해온 가부장적 배경의 글쓰기에 반기를 드는 글쓰기라는 말이다. 그의 해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눈으로 읽어내린 이성아의 글들을 천천히 느긋하게 떠올려보곤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전통의 가치관으로 여겨왔던 순종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해설을 읽고 나면 어느정도 이 소설집이 지니는 주제의식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왜 해설에 이다지도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지루한 감을 접했고, 반복되는 서간체 형식의 글쓰기와, 결말부분에서 여러번 느껴지는 허전함 때문에 쉽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단편을 한편씩 떼어 보면 괜찮겠지만, 여러편의 단편을 몰아서 읽다보면 이렇게 반복되는 분위기에 단조로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딴은 이것이 이 작가만의 개성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또 다른 생각도 이어진다.

다만 소설을 통해 소설의 주제와 현대사회의 모순된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갖는 허무와 어떤 동경 내지는 이상의 상관관계를 굳이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고 중얼거린다. 그러기에는 소설 읽는 감각이 너무 무뎌지고, 그런 까닭에 혼자 독설을 내뱉으며 횡설수설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제목을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라고 정했다. 그녀가 말하는 태풍은 어쩌면 장성규의 이론, 오이디푸스 이론의 외곽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했던 것으로부터의 다른 이질감, 그것이 품어내는 생경스런 감촉과 느낌들. 그리고 낯선 어떤 것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 나는 이 모든 감정의 주머니를 작가가 그려내려 애썼던 태풍이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성아의 소설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무게감도 어느정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설이 갖는 무게감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만나 접하면서, 우리는 내면에 숨어있을 법한 익숙하지 않은 다른 세계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재미나게 읽었던 작품은 ‘그물 치는 남자’, ‘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들은 장성규의 해설 가운데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재미나게 읽었던 작품들이 하나같이 장성규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이론의 외곽에서 시작된 글쓰기의 영역에서 살짝 비껴간 것일까. 내가 이 소설집을 읽는 과정에서 품었던 중심된 생각은 분명 장성규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그는 평론가이고 나는 일개 독자일 뿐.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를테면 길을 잃고 주저하며 고민하는 듯한 인물상보다 현실적이며, 생동감있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인물을 사랑하는가보다. ‘그물 치는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애착이 간다. 물론 ‘복순이’에 대한 이야기는 화자가 어린 여자아이라는 점과, 스토리의 절정에 이르는 소재가 기존에 문학작품에서 이미 보았을 법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톡톡 튀는 신선미는 다소 부족할지 모른다.




각설하고, 문학은 늘 재창조되는 것이라 믿는다. 혹자는 톨스토이 후의 창작되는 작품들은 모두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도 했다.

한 편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앓는 고충에 대해 말하길, 생니가 빠져나가는 고통이라 했던가. 원래 글을 쓰는 것보다 작품에 대해 왈가불가 이런저런 수다 떠는 일이 훨씬 수월한 일이다. 비할게 못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작가 이성아의 신작을 기다리고 싶어진다. 또다른 그녀만의 세계를 접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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