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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자다 - 왕멍, 장자와 즐기다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일흔 일곱 번 째 서평
나는 장자다-왕멍
장자를 사랑한 왕멍
장자를 읽는 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책을 붙들고 있는 까닭은 오기도 아니고 고집도 아닌 다른 감정이 개입한 까닭인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순수한 감정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책 “나는 장자다” 번역물이다. 중국의 학자이며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왕멍’ 에 의해 저술됐다 한다. 왕멍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듣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인물이다. 그가 중국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또 그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린다는 이를테면 사회적 지위에 대해 호감이 갔던 것도 아니었다. 책은 오로지 책만으로 마주해야 하지 않은가.
다만 나의 관심사는 장자뿐이었다. 그러나 장자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장자의 이론(제자들과의 대화, 또는 직접 쓴 이야기, 인용 등)들을 일정한 주제에 맞게 선별하고, 왕멍의 해설이 덧붙여지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은 장자가 쓴 책이라기 보다는 왕멍이 장자의 것을 가져다 재해석하고 살을 붙여 풀이해놓은 책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장단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장점이라 한다면, 원문을 접할 때 마주하는 이해와 해석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해결해준다는 데 있을 법하다. 반면 왕멍이라는 학자 개인의 사유와 역사관에 의해 일정부분 걸러진 까닭에, 장자의 학문과 정신적인 체계가 처음의 순수성을 지닌 날것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약간의 반감이 생기려든다. 욕심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필연적인 수순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반드시 장자의 원문이 실린 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장자를 사랑한 왕멍
그렇다고 왕멍의 장자사랑에 대한 예찬론을 가볍게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고 무시해서도 안 될 노릇이다. 사실 “나는 장자다”를 읽고 기록으로 남기려 할 때, 어디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를 생각했던 것 같다. 장자냐, 아니면 왕멍이냐... 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그만큼 장자를 풀어가는 왕멍의 이야기는 책 한권을 통틀어 시종일관 조용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의 글은 안정적이고, 생각에 있어 깊이감과 설득력을 지녔다. 또한 정치 경제 문화를 한번에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의 방향성을 함유한다. 무엇보다도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인 양 시대의 흐름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말 그대로 좌지우지 하면서, 장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과거, 현재의 순간순간을 오버랩하는 식의 언변이 가져다주는 재미는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과, 미국의 부시, 지금의 대통령인 오바마까지 왕멍의 전문적 고견이 묻어나는 이야기는 시대, 역사, 국가를 초월한다. 그리고 냉정한 비교분석이 이어진다. 그것은 어쩌면 책의 주인공인 장자의 이론과 맞물리는 것이 아닐까.
-대도
장자라고 하면 호접몽만이 기억에 들어차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학교 때 배웠던 부분에서 유독 기억나는 것이 그 나비인 것을 어쩌랴.
왕멍의 소개로 만난 장자는 감추고 있는 것이 아주 많은 신비주의자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씩 하나씩 그가 감추고 있는(기실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것을 열어보면서 들여다보는 일은 약간의 끈기를 요구하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이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책 속에는 비단 장자의 이야기만 나오지 않는다. 당대의 이름을 알리고 이었던 맹자나 공자, 노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부분 공유한다.
책의 전반부는 인생으로 치자면 태어나서 유아기를 거치고 청년기에 들어서 스스로의 행실에 대한 어떤 지론의 핵심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자아를 어떤 방식으로 단련시키며 주변과의 융화를 이뤄나갈지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후반부에 가서는 청년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을 한다거나, 어떠한 일을 시작함에 있어 중도를 지켜가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실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구분하는 일도 이에 속한다.
책속에 들어차 있는 무수히 많은 예시와 상징들 속에서 분명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실이다, 라는 작은 선물을 찾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찾은 선물조차 종단에는 무의미하며 무가치 하다는 말이 된다.
대도와 중용은 함께 간다. 갑자기 선물 이야기를 하다가 대도와 중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나 또한 장자의 이야기 흐름의 맥을 닮아 가는가 싶다.
4부 인간세에서(人間世-세상에 쓰이는 현묘함과 허물이 없는 신명神明)에서) ‘악화의 법칙’이 등장한다. 인간관계와 인간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많은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고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것을 대도와 중용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맞게 이해한 것일까. “사실은 처음에 보여주었던 모습이 가장 훌륭한 모습인 것이다” 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저자 ‘왕멍’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기에서 ‘악화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함을 유지하고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도리를 이해하며 너무 지나치게 추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급류에 휘말렸을 때 용감하게 물러나고, 관직에 연연하지 않으며, 올라가야 할 때는 올라가고, 내려와야 할 때는 과감하게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 p286
책은 쉽게 접근해서 읽어나갈 수 있는 보편성(일반인을 향한 대중성)보다는 전문성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어 보인다. 그나마 기존에 출간된 책의 성격과는 달리 지식인의 사유가 가미된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데서 신선함을 갖는다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그러나 각설할 일이다. 장자가 그리 쉬운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에 전문성과 보편화된 대중성의 양대 물꼬를 동시에 틀어쥐고 있는 책이 또한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