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武와 전쟁 - 인간의 몸짓, 사회의 무예, 조선의 전쟁사
박금수 지음 / 지식채널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서적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아흔 두 번째 서평

조선의 武와 전쟁-박금수


 武, 역사 속에서 다시 만나다.


 가끔 인터넷 뉴스에 UFO관련 기사를 볼 때가 있다. 얼마 전에 실린 사진은 선명한 원반형의 미확인 비행물체였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놀랍다고 떠들었다지만 어쩐지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 수 없는 것들의 출몰은 당혹감을 불러들인다. 매 순간 안다는 것을 전제로 살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은 까닭이다. 하지만 미확인 물체는 보통의 신체리듬과 인식을 마구 뒤흔드는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어렸을 때 봤던 영화의 영향이 컸던가보다. 외계 생물체들이 지구로 접근하는 이유를 두어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갖는 의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지 간에 그들의 접근은 비교적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어느 과학자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드문드문 나타나 마치 탐색전이라도 하듯 시간을 끌다가 어느 순가 하늘을 덮어버리지 않을까. 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정복의 차원인지, 아니면 새로운 생명체와의 교류를 위함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가 없다

순간 인간 본능의 한가지라고 말하는 전쟁과 정복에 대한 의지가 이들 먼 우주의 낯선 존재들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아니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했었던 것 같다.


박금수가 펴낸 책 ‘조선의 武와 전쟁’은 크게 무(武)라는 소재를 가져와 풀어낸 인문서적이다. 인간이 시대를 살아내는 것처럼 역사와 전통 역시 시대를 버티며 살아낸다고 생각한다. 이 지나한 세월을 살아낸 오롯한 역사 가운데서 저자 박금수가 찾아낸 무(武)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나름의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고백하건데 전쟁사에 관한 이야기인지라 지루하지 않을까 했던 처음 생각은 기우였다.

조선이 문치주의를 주창하여 무(武)의 역사가 가려져 있었던 것을 인지하면서도 결국 한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무(武)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모순처럼 느껴진다. 박금수는 이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모순과 아이러니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가려져 있던 무의 가치를 새롭게 밝혀내려는데 노력을 기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내용을 감수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책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성실함을 보인다. 역사서가 아닌이상 깊이 치우치지 않아 버겁지 않다. 그러면서도 시간에 따라 무(武)가 어떻게 발전하고 진행되었는지를 순차적으로 적어나가고 있는 점이 무엇보다도 읽는 이에게 흥미와 신뢰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이번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무와 관련한 역사서적의 발굴이라는 의미에서도 이에 맞는 가치를 인정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최초의 국가 공식무예서 ‘무예제보’와 사도세자의 십팔기를 정리한 ‘무예신보’ 그 아들인 정조가 완성시킨 ‘무예도보통지’ 등과 같은 시기별로 편찬된 무와 관련한 책자들의 소개가 무엇보다도 시선을 끈다. 다양한 무기의 상세한 소개와 활용법, 권법, 전쟁과 관련한 실용적인 전법 그리고 각각에 맞는 그림과 재연사진을 같이 보여주고 있기에 독자는 상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눈으로 직접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은 셈이다.

낯선 분야에 대한 배려이지 싶다. 보통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쉽게 풀어쓰고, 그림과 사진도 편집해 이해도를 높이고 있는 책은 그런 면에서 무척이나 친절하다.


책에 대한 총체적인 느낌은 간단명료하지만 나름 책이 지니는 힘은 크다.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살아왔으나, 빛을 발하지 못했던 무의 세계를 소개하는 동시에, 무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저자 자신의 의지를 싣고 있다. 어쩌면 저자 박금수는 십팔기의 재정립을 위해 한권의 책을 출간해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로 그의 십팔기 애정은 각별하다.

어느 시기에서는 서양의 개방 압력에 의해 또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동시대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하며 변화하고 또 잊혀져왔던 우리 전통 무예의 다양한 초상을 책 한권에 고스란히 모았다.

부록으로 싣고 있는 조선 무예 훈련터와 십팔기에 대한 이야기는 덤이기는 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각설하고 나라가 태평하기 위해서는 유연하면서도 강한 무(武)가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정확한 지적이다. 그런데 유연하면서 강한 무라는 개념이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때 그때 달라요~~’ 했던 어느 유행어처럼 순간순간 상황에 맞게 잘 응수하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그런데 이 정설이 우리 은하계를 벗어나 먼 우주 외계 미확인 물체의 주인공들에게도 들어맞을지 미지수다.


여담이지만 건강을 위해서 책속에 소개된 권법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운동을 좀 해야할 필요성이 있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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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클리닉 - 목적을 달성하는 결정적 한 방
임승수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아흔 한 번째 서평

글쓰기 클리닉 -임승수 지음


시원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글쓰기와 관련된 책은 비교적 잘 읽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커다란 틀에 의식을 가두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글쓰기와 관련한 책을 고의적으로 멀리했다면 고약한 발상일까. 일절하고 나는 글쓰기에 있어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요시 하고 있다. 설사 그것이 글에 있어 한 비유를 들자면 어떤 방종이나 또는 방탕에 가까운 결과를 자초하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시작은 형식과 제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좋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바람이 불었다. 글쓰기와 관련한 책을 붙잡고 읽고 있으니 이 무슨 휑한 바람일까. 혹 무겁지는 않을까, 따분하지는 않을까, 새로운 틀에 갇히지는 않을까. 노파심에 불안감에 끊임없이 섣부른 판단들이 줄을 지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떨어져나간 듯한 인상이다.

임승수의 책은 시원시원 글 읽는 맛이 나는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존의 틀에서 살짝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기존의 글쓰기를 강조해온 책에서 풍기는 무게감은 가볍게 날려버리고 책은 산뜻하리만큼 가볍게 출발한다. 이공계를 전공했기에,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몸소 체험을 했다는 저자 임승수. 그의 과거 전공과 현재의 글쓰기가 바로 이 책의 승부수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스스로 겪으며 터득한 노하우를 거침없는 필력으로 써내려간 책은 솔직히 글과 관련한 평범한 자기계발서임에는 틀림없지만 밉지가 않다. 무도회장에 패치코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면, 그는 당연 패치코트를 벗어버리고 하이힐을 창문너머로 던져버릴 사람이다. 그리고도 흥쾌히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사람이다.  

글쓰기가 두려운 그대에게, 이럴 땐 이렇게 써라(업무편, 생활편), 문장강화 라는 큰 틀로 구성된 그의 저서가 유독 주목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의 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임승수 그의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것은 글을 쓰는 내가 아닌 내 글을 읽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책 한권에 여러 번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목적에 맞는 글을 쓰라는 것인데, 이 역시 글을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흔히 글을 잘 쓰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주체가 되어 작가도 독자도 나라는 존재에 한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쉬운데, 저자는 그 점을 확연하게 꼬집어주고 있는 듯하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임승수 그의 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듯하다. 쉽고 명쾌하게 접근하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대로 책은 걸리는 대목 없이 시원하게 술술 잘 넘어간다. 다만 간결함에 너무 찔러 넣기 식의 느낌이 남는 듯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하는 말은 세태에 꼭 들어맞는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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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의 재발견 - 불온한 과학자들의 우연하고 기발한 발견들 딴짓의 재발견 1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지음, 양진성 옮김 / 애플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아흔번째 서평

딴짓의 재발견-니콜라 비트코프스키/양진성 옮김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 이야기


니콜라 비트코프스키는 작가겸 물리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인문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설명하는 재주를 지녔다는 소개문이 눈길을 끈다.

쉽고 재미있는 과학이라는 수식이 이 한권의 책이 갖는 주제와 특징을 비교적 잘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은 28가지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찰스 다윈과 그의 가계를 소개하는 이래즈머스 다윈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이 중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다양한 과학의 시초 내지는 초기 과학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순간들과, 깊이 몰입했던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 모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학, 우주와 관련한 천체학, 화학, 생물학 등등 다양하면서도 세밀하게 뻗어나가는 과학 분야를 비교적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연한 계기로 획기적인 이론을 찾아내 과학계나 의학계의 큰 획을 지을만한 위대한 업적을 일궈낸 이야기라든지, 현대 과학의 탄탄한 모티브가 되는 이론의 창시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책 한권을 통해 가득 들어차있다.

쉽게 쓴 과학 이야기라는 저자의 말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전문적 용어와 해설은 저자의 의욕만큼이나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테면 깊이 들어가 설명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듯하다. 어느 한 이론에 대해 몰입해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하노라면 저자의 의도에서 곧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형식면에서는 비교적 단순하게 과학적 원리와 그 분야에 뛰어났던 인물과 그들의 일화를 소개하는데서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없어보인다. 책은 한 주제를 놓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나의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하는가 싶으면, 저자는 어느새 새로운 인물들을 줄기차게 소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라든지, 동시대의 경쟁자 또는 같이 연구하던 누구,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서 한 인물이 속한 사회적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정말이지 한 챕터 안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수록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어가다보면 A에 대한 이야기인지 B에 대한 이야기인지 순간 혼돈이 올 때도 있었다. 은근슬쩍 B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저자의 글쓰기 패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번역에 의한 결과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 주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이웃한 챕터와 크게 구분 짓지 않고 두루두루  책 한권 안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자가 과학이론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 즉 예술적 측면이라든지 마술 같은 이를테면 비과학적인 분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몰입했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다분히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바람처럼 어디까지나 재미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하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을 원했지만 어쩐지 결과적으로 너무 가벼워진 것은 아닌가, 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찰스 다윈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나 소설가로 알려진 에드거 앨런 포의 과학자로서 새로운 면모를 접했던 부분이 유독 기억에 남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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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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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아홉 번째 서평

철학으로 읽는 옛집-함성호 지음


역사를 살아낸 집 이야기


철학과 옛집의 조화라. 어딘지 모르게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차곡차곡 잘 개어 내놓은 반듯한 이불 호청처럼 이미지가 곱다. 책은 시인이자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저자 함성호의 이력만큼이나 독특하다. 제목에서 나오는 철학은 어떤 철학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옛집으로 운을 떼고 고즈넉한 우리네 전통 기와집과 나무가 있는 너른 마당이 한층 돋보이는 사진을 싣고 있으니 기실 서양철학은 아님에는 분명하다. 좁은 의미에서 문맥상의 철학을 책 속에서 찾으려한다면 어쩌면 금방 실증이 나지 않을까 싶다.

함성호 그가 말하는 철학은 삶의 철학이지 않을까. 그 삶의 철학이 오롯하게 서기까지 역사와 함께 긴 세월이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옛집은 저마다 사연이 있는 곳이다. 흔한 표현을 빌자면 유서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낙향해 지은 집, 가족을 위해 지은 집, 학문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지은 집처럼 각각의 건물은 사연도 많고 의미도 깊고 다양하다.

지은이는 각각의 건물과 함께 건물을 지어올린 인물 그리고 당대 사회 정치적 흐름을 총괄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큰 맥락일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살아낸 집 이야기다. 어느 시대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려하고 실용적이기까지 한 집을 한 채 한 채 지어 올렸던 미묘한 이 상관관계에 대한 끌림이 작용 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집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 건물과 자연의 조화 내지는 건물과 인간의 조화라는 측면을 생각했던 것 같다. 지은이의 설명을 쫒아 가다보면 옛사람들의 생활면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허투루 지어낸 것이 없이 하나같이 꼼꼼한 판단과 사고에 의해 집을 지어냈다는 데 적잖이 놀랐던 것 같기도 하다. 책 속에는 정확히 기대승와 퇴계의 논쟁이 나오고, 몇몇의 크게 일어났던 사화를 소개하는 동시에 예송논쟁 같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까닭은 역사와 인간의 삶 그리고 집이 서로 떼어낼 수 없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점에서 두 번째 생각했던 것이 두 마리의 토끼를 얼마나 잘 잡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책은 역사를 논하는 책은 아니다. 집과 건물을 논하기 위해 배경지식으로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한데 결과적으로 역사와 집에 대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욕심을 내자면 전자가 아니 후자 즉 집과 건물에 심층적이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진다.

세 번째 흑백사진이 풍기는 두 가지 영향력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흑백사진이 주는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옛 것에 대한 감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란한 색의 조화보다는 무채색이 주는 안정감이, 보는 이의 시선에 잔잔한 느낌으로 다가오며 무엇보다도 세월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데서 책의 핵심인 옛것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흑백사진은 그러한 긍정적 요소를 갖는 동시에 지은이의 설명을 따라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일정부분 어렵다는 느낌을 갖게 했던 것 같다. 흑백사진이 주는 분위기와 함께 건물 자체의 그림자가 풍기는 어둠이 조금은 과하지 않았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딴지 하나를 더 걸고 넘어가려 한다. 이번 책은 개인적인 에세이의 측면보다는 공적인 교양서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개인적 사견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가. 어쩌면 글을 쓴 작가의 식견이 더 현대적이고 개성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대중을 위한 글이므로 조금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표현의 자유가 얼마만큼 가치를 인정받는가라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역량에 의해 달라진다. 하지만 책은 무엇보다도 읽는 이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소 거친 문장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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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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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여든 여덟 번째 서평

사도세자가 꿈꾼나라-이덕일 지음

 

휘둘리는 사도세자, 이선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책 한권으로 과연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낼 수 있을까. 내가 모 출판사에서 출간된 한중록을 읽은 것은 2010년 도였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조금 넘어서 한중록과 같은 동시대의 동일 인물 즉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담긴 이덕일의 책을 접해본다. 작가 이덕일이 오래전에 책을 내고 다시 개정판을 냈다는 이야기 또한 처음 접하는 이야기다. 처음이라 생경스러운가. 어쨌든 너무나 친근한 이야기가 아닌가. 숙종 때부터 이어지는 조선조 왕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언제 접해도 지루하지 않는 매력적인 요소임에는 분명한 일이다.

역사를 좋아하지만 뭐라고 할까. 나는 아직 나만의 역사관을 갖지 못한 듯하다. 다만 내가 믿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분명하게 엇갈린 해석을 불러오거나 혹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데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어쩌면 사실의 기록을 남기는 일보다도 역사를 다루는 글에 있어서 지은이의 역사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작가 개인의 역사적 관점이 표면화 되어 확고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신념과 역사관을 심중 깊숙한 곳에 담아놓으면서도 중립적이고 딴은 객관성을 확보 유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그렇긴 한데 개인적으로 나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며 존중 받아야 된다고 믿고 있다.


책의 내용과 가치를 살펴보기에 앞서 책의 맨 첫부분에 실린 들어가는 글과 프롤로그의 다소 긴 이야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솔직히 이렇게 장문의 들어가는 글은 처음 봤다. 저자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나라’는 이미 출간된 책 ‘사도세자의 고백’의 개정판이다. 작가들이 개정판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소설가는 개정판을 내면서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수정하고, 비교적 현대에 익숙하면서도 쉬운 표현으로 문장을 재정비했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작가들이 개정판을 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사실 이덕일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와야 했던 까닭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상대가 제시한 이론을 반박함과 동시에 반론을 재기하기 위한 분명하고 필연적인 목적의식이 강하게 적용되고 있는 단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들어가는 글은 이덕일과 그의 숙적처럼 보이는 한중록의 저자 정병설과의 첨예한 대립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이들 두 사람의 공방을 눈으로 보는 일이 그다지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작가답지 못한, 감정에 치우친 표현들이 눈에 띄고 서로 틀렸다 맞다 앙앙거리며 으르렁 대는 모습들 같아서 정말이지 인내심을...바닥까지 탕진해버려 텅비어버린 인내심을 어렵사리 밖에서 낑낑거리며 끌고 와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아야 할 정도로 지루했던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오로지 사도세자의 이야기로 만나고 싶었다. 그것이 욕심이었던가. 독자는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에 혈안이 되기보다는 그저 사도세자라는 인물과 당대 정치와 흐름을 알고 싶어서 책을 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독자를 배려한다면, 이런 식의 갑론을박 박 튀기고 침 튀기는 혈전 따위는 책과는 달리 다른 지면을 할애해야 했던 부분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크다.


결과적으로 어쨌든 나는 정병설의 한중록을 읽으면서 작가 정병설의 역사관에 대해 일정부분 객관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찾아내곤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덕일처럼 노론을 지지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한계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노론지지자라니 그럼 이덕일은 정병설과는 다른 소론을 지지 추종하는 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인가. 노론 소론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이야기이며, 역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을 2000년도 현 시점에까지 끌고 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물론 정병설의 한중록이 노론 중심의 이야기로 비춰지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이야기이며 그것은 과거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앙숙같이 보이는 두 사람이 쓴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 읽는 기회를 접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맞다 틀리다의 판단은 아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고, 오로지 나 그리고 독자의 판단이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까지 노론 소론을 운운하는 지류에 속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책은 분명 한중록과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분 부분 한중록과 비교하면서 논리적으로 차이점과 오점을 풀어가는 대목에서 저자 이덕일의 노고가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한중록이 혜경궁 홍씨의 기록을 쉽게 풀어냈다고 한다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당대 있었던 사건과 정치적 흐름을 한중록이라는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사실성과 객관성을 필두로 아주 집요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접근방법이 달랐고, 각각의 두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낸 한권의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종단의 목적이 달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책이 내보이고 있는 차이점에서 재미를 찾을 수가 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역사는 그렇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정말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씁쓸한 일인 동시에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한중록에서 힘없고 나약한 사도세자가 이덕일의 저서에서는 한 나라의 왕세자였음을 인정할만한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서고 있다. 한 가지 더 재미를 찾은 일이 있다면 바로 영조라는 인물의 케릭터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팽팽하게 날을 세우는 정병설이나 이덕일 두 사람이 비교적 같이 동일 모드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조의 이미지인데, 그나마 이덕일의 책에서는 영조가 세자로부터 느끼는 감정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아들을 죽인 파렴치한 미친 아비와 그 희생양인 아들이라는 세간의 고정된 인식에서 각자의 제자리로 옮겨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사실 컨트롤하기 어려운 인성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그도 아니면 지나치게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중요한 것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믿는다. 정병설과 이덕일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어느 미래시간의 역사학자가 새로운 학설과 절대 중립의 역사관으로 다시 사도세자와 영조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들고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정병설의 한중록에 비해 문장과 표현 그리고 어법이 현대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읽기 속도는 더 빠른 책이었다. 사도세자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이라고 할지, 이덕일의 표현을 정리하자면 가려져 있던 사도세자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지금 이 순간까지 불행하게도 이 사람 이선(사도세자)가 많은 이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듯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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