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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여든 여덟 번째 서평
사도세자가 꿈꾼나라-이덕일 지음
휘둘리는 사도세자, 이선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책 한권으로 과연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낼 수 있을까. 내가 모 출판사에서 출간된 한중록을 읽은 것은 2010년 도였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조금 넘어서 한중록과 같은 동시대의 동일 인물 즉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담긴 이덕일의 책을 접해본다. 작가 이덕일이 오래전에 책을 내고 다시 개정판을 냈다는 이야기 또한 처음 접하는 이야기다. 처음이라 생경스러운가. 어쨌든 너무나 친근한 이야기가 아닌가. 숙종 때부터 이어지는 조선조 왕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언제 접해도 지루하지 않는 매력적인 요소임에는 분명한 일이다.
역사를 좋아하지만 뭐라고 할까. 나는 아직 나만의 역사관을 갖지 못한 듯하다. 다만 내가 믿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분명하게 엇갈린 해석을 불러오거나 혹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데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어쩌면 사실의 기록을 남기는 일보다도 역사를 다루는 글에 있어서 지은이의 역사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작가 개인의 역사적 관점이 표면화 되어 확고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신념과 역사관을 심중 깊숙한 곳에 담아놓으면서도 중립적이고 딴은 객관성을 확보 유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그렇긴 한데 개인적으로 나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며 존중 받아야 된다고 믿고 있다.
책의 내용과 가치를 살펴보기에 앞서 책의 맨 첫부분에 실린 들어가는 글과 프롤로그의 다소 긴 이야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솔직히 이렇게 장문의 들어가는 글은 처음 봤다. 저자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나라’는 이미 출간된 책 ‘사도세자의 고백’의 개정판이다. 작가들이 개정판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소설가는 개정판을 내면서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수정하고, 비교적 현대에 익숙하면서도 쉬운 표현으로 문장을 재정비했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작가들이 개정판을 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사실 이덕일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와야 했던 까닭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상대가 제시한 이론을 반박함과 동시에 반론을 재기하기 위한 분명하고 필연적인 목적의식이 강하게 적용되고 있는 단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들어가는 글은 이덕일과 그의 숙적처럼 보이는 한중록의 저자 정병설과의 첨예한 대립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이들 두 사람의 공방을 눈으로 보는 일이 그다지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작가답지 못한, 감정에 치우친 표현들이 눈에 띄고 서로 틀렸다 맞다 앙앙거리며 으르렁 대는 모습들 같아서 정말이지 인내심을...바닥까지 탕진해버려 텅비어버린 인내심을 어렵사리 밖에서 낑낑거리며 끌고 와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아야 할 정도로 지루했던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오로지 사도세자의 이야기로 만나고 싶었다. 그것이 욕심이었던가. 독자는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에 혈안이 되기보다는 그저 사도세자라는 인물과 당대 정치와 흐름을 알고 싶어서 책을 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독자를 배려한다면, 이런 식의 갑론을박 박 튀기고 침 튀기는 혈전 따위는 책과는 달리 다른 지면을 할애해야 했던 부분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크다.
결과적으로 어쨌든 나는 정병설의 한중록을 읽으면서 작가 정병설의 역사관에 대해 일정부분 객관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찾아내곤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덕일처럼 노론을 지지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한계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노론지지자라니 그럼 이덕일은 정병설과는 다른 소론을 지지 추종하는 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인가. 노론 소론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이야기이며, 역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을 2000년도 현 시점에까지 끌고 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물론 정병설의 한중록이 노론 중심의 이야기로 비춰지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이야기이며 그것은 과거의 한 페이지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앙숙같이 보이는 두 사람이 쓴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 읽는 기회를 접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맞다 틀리다의 판단은 아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고, 오로지 나 그리고 독자의 판단이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까지 노론 소론을 운운하는 지류에 속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책은 분명 한중록과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분 부분 한중록과 비교하면서 논리적으로 차이점과 오점을 풀어가는 대목에서 저자 이덕일의 노고가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한중록이 혜경궁 홍씨의 기록을 쉽게 풀어냈다고 한다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당대 있었던 사건과 정치적 흐름을 한중록이라는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사실성과 객관성을 필두로 아주 집요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접근방법이 달랐고, 각각의 두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낸 한권의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종단의 목적이 달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책이 내보이고 있는 차이점에서 재미를 찾을 수가 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역사는 그렇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정말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씁쓸한 일인 동시에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한중록에서 힘없고 나약한 사도세자가 이덕일의 저서에서는 한 나라의 왕세자였음을 인정할만한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서고 있다. 한 가지 더 재미를 찾은 일이 있다면 바로 영조라는 인물의 케릭터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팽팽하게 날을 세우는 정병설이나 이덕일 두 사람이 비교적 같이 동일 모드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조의 이미지인데, 그나마 이덕일의 책에서는 영조가 세자로부터 느끼는 감정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아들을 죽인 파렴치한 미친 아비와 그 희생양인 아들이라는 세간의 고정된 인식에서 각자의 제자리로 옮겨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사실 컨트롤하기 어려운 인성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그도 아니면 지나치게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중요한 것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믿는다. 정병설과 이덕일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어느 미래시간의 역사학자가 새로운 학설과 절대 중립의 역사관으로 다시 사도세자와 영조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들고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정병설의 한중록에 비해 문장과 표현 그리고 어법이 현대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읽기 속도는 더 빠른 책이었다. 사도세자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이라고 할지, 이덕일의 표현을 정리하자면 가려져 있던 사도세자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지금 이 순간까지 불행하게도 이 사람 이선(사도세자)가 많은 이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듯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