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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일의 엘불리 - 미슐랭★★★, 전 세계 셰프들의 꿈의 레스토랑
리사 아벤드 지음, 서지희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두 번째 서평
180일의 엘불리-리사아벤드지음 /서지희 옮김
화덕 위의 전사들
-엘블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요리에 대해서 요리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종일 몰입하고 일하는 곳 주방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처음 책을 읽고 싶었던 욕심 내지는 동기는 딱 한가지만은 아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냄새가 진하게 풍겨나는 그런 주방이 보고 싶었다. 단순히 요리가 만들어지는 곳이라는 한정된 인식이 아닌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그들의 삶. 치열하고 뜨겁게 달궈진 삶의 터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흔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요리사들의 애환보다는 보다 깊이감 있고 생동감 있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인간미를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다 덮고 엘불리는 책상 한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졌다. 이제 나는 어떤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걸까. 어떤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면 좋을지 잠시 생각한다.
엘불리는 스페인의 시골 어느 한적한 곳에 있는 레스토랑의 이름이다. 외진 곳이기는 하지만 풍광이 아름답기에 관광객으로 늘 분주한 곳이라고도 했다. 책은 저자인 ‘리사 아벤드’라는 기자가 이곳 엘불리 레스토랑에서 같이 생활하며 직접 보고, 느끼고, 부딪쳐가며 체험한 일상에 대한 철저하고 생생한 기록일지다. 반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딱 6개월간의 기간동안 모든 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 중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계의 거장들 속에 이름을 올린 엘불리의 리더 ‘페란 아드리아’의 존재감이 우뚝 서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실습생 명목으로 전 세계에서 많은 지원자들이 엘불리의 문을 두드리지만 초대권을 받게 되는 이는 극히 일부분이다.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희생과 봉사의 차원에서 무보수로 6개월간의 고된 실습생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차분하다. 이 이야기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것이 책 180일의 엘불리가 갖는 매력이다.
책은 비단 요리를 매개체로 한 여느 책과는 분명 차별성을 갖는다.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느 때는 새벽까지 온종일 서서 일하는 실습생과 엘블리를 이끌어가는 직원들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담아내고 있다는데서 나는 처음 품었던 욕심 하나를 완벽하게 건져올렸다는 희열을 만끽한다.
책을 써나가는 저자의 시선은 분석적이고 중립적이며 때로는 건조하다. 다만 저자 역시 엘불리의 간판인 페란에 대한 존경심은 뜨거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리계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요리장이라든지, 잘 나가는 유명한 요리사에 대해 얼마나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나는 엘불리라는 레스토랑도, 페란도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리고 책속에 등장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를 들여다보면서 아무도 없는 빈 집의 하나뿐인 책상 의자에 앉아 박수를 치고 있다. 그리고는 젊음과 열정이 요리와 어우러지는 연계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책 속에는 페란의 요리철학과도 같은 아방가르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창조성과 아방가르드 그것이 엘불리가 지켜오는 철학인지도 모른다. 문득 요리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자주 언급되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요리는 과학이고, 나아가 예술의 범주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쯤되면 나도 어지간히 페란의 요리철학에 물들어가는 것일까. 어쨌든 엘불리의 실습생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실습기간을 종용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도 요리는 순수한 요리 그 자체가 더 좋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한다.
반가운 것은 엘블리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 이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 루크와 서니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앞으로의 이들 두 젊음이의 앞길이 순탄하게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 한자락 풀어놓는다.
바다건너 스페인의 어느 곳에 있다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이야기다. 한번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치열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탄력 있는 푸딩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구성면에서는 실습생들의 이야기와 엘블리 직원들의 이야기가 구분 없이 앞뒤로 실린 듯 해 다소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저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엘블리 그리고 페란을 찾는다고 했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는 엘블리의 정신을 배워가려는 이들의 강한 의지가 아닌가, 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묘하게 긴 여운을 남긴다.
성실함, 노력, 인내, 그리고 창조성, 무엇보다도 도제제도를(상하복종에 의한 계급인정)수용하는 동시에 개인에게 기회를 주는 분위기. 그러나 의외로 극히 의외로 페란의 폐쇄적 사고의 일부분을 접할 때 만나는 혼란조차 흥미롭다.
똑같은 일상과 변화 없는 반복성이 주는 지루함과 이 지루함이 몰고 오는 불온한 기운인 나태함을 극복하고 난 자만이 저 유명한 레스토랑 엘블리 실습생이었다는 하나의 자격을 얻게 된다. 그들이 선택한 길을 걸어감에 있어 각자 어느 자리에서 서게 되던지, 한때 열정을 바쳤던 그 곳에서의 시간을 반추하며 스스로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 속에는 화덕위의 전쟁이라는 표현이 실렸다. 어디서나 의견과 의견은 충돌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한다. 어디 비단 요리계 뿐인가 말이다. 중요한 것은 화덕 위에서 몰입할 수 있는 진정한 전사로 살아남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만의 세계가 완성된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일절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해봤다는 데서 오는 충족감은 크다. 더군다나 생전 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한 특이한 요리가 가득한 곳 바로 엘블리의 주방이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