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적의 벚꽃

-서정의 무게감-

 

 

대만 작가 왕딩궈의 작품이다. 사실 중화권 소설에는 익숙하지 않아 그만큼 새롭고 또 그만큼 설렜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게 있어 2000년 이후에 출간된 소설은 말 그대로 ‘낯설게 하기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깊이 들여다본 소설 작품도 많지 않을뿐더러, 최근 젊은 작가들의 성향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작가들과 작품들은 90년대 안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라고 은유적으로 말해야 할 듯하다. 왕딩궈의 작품에 끌렸던 까닭은, 절필 끝에 오랜만에 소설을 들고 돌아왔다는 작가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딩궈의 ‘적의 벚꽃’을 읽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속도가 잘 붙지 않았다. 왜였을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무언가의 무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우스워지려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이 갖는 보이지 않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보던 때가 아마도 20대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에 말미에는 이례적으로 4편의 추천사를 비롯한 해설이 실렸다. 모두 중국학자, 평론가, 시인의 글이다. 어쩌면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자세한 소개를 위한 목적도 일정부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책을 소개할 때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해와 보다 객관적인 해설이 들어가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나는 이례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그다지 많은 분량의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설이 참 많이도 실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저자 왕딩궈와 그의 작품을 생각하는 대만인들의 관심과 사랑이 높은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과 사건 속에서 상처받고 넘어지고 다시 극복하기를 원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삶의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때로는 힘든 인간관계와 부조리한 사회를 대표하는 얄궂은 현실 앞에서, 삶의 본질을 알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절망적인 결말로 혹은 어떤 뚜렷한 결말이 아닌 열린 결말을 독자에게 선물처럼 건네는 작가의 의도도 여럿 보아왔다.

 

‘적의 벚꽃’ 역시 상처 받은 사내가 등장한다. 돈과 권력 앞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주인공 나에게 여자가 찾아온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라는 이름의 순간이 덮쳐온다. 이 불행은 이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남자는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기 위해 외딴 바닷가에 카페를 연다. 인적이 드문 곳에 카페를 연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소설의 시선은 이 카페를 찾았던 노인의 존재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걸 복수와 복수라는 단순한 어휘로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개인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의 크기는 같지 않으니 말이다. 치사하거나 속 좁은 복수, 거창한 복수, 위험한 복수 등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그런데 말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다른 방법을 원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정말 말 그대로 복수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함으로 또다른 차원의 착한 복수?를 선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나, 즉 주인공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직접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가해자로 지목된 노인이 스스로 자멸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가해자의 파멸과 피해자의 회한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주인공을 위한 작가의 위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플롯에 의존하기보다는 내면의 심리에 더 집중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유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복선과 암시 역시 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왕딩궈의 ‘적의 벚꽃’에서 시적인 분위기를 내는 은유와 상징의 맛이 담긴 표현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 어떤 존재로 관계하고 있을까...

 

책 ‘적의 벚꽃’은 묵직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인생의 씁쓸함을 아는 사람만이 커피의 묵직한 향기를 폐부로 받아들여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독한 영혼을 깨워낸 뒤, 터져 나오려는 신비로운 탄식을 욱여 삼켜 비루한 식도와 목구멍 사이에서 수줍게 맴돌게 할 수 있었다. p31

 

-아뇨, 선생님의 영혼을 불러낼 방법을 찾을 거예요. p64

 

-괜찮아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기다릴게요. p69

 

-그때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놓았더라면, 슬픔이 가져다주는 신비한 힘을 그녀가 적당히 감당할 수 있게 했더라면, 어쩌면 좌절이 찾아왔을 때 그녀가 그렇게 급히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p80

 

-푸른 잎사귀 안에 감추어져 있던 마른 가지가 공중에서 부러지면서 부러진 가지 끝이 화살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꽃도 잎사귀도 달려 있지 않은 마른 가지가 흐릿한 환영처럼 날아와 피할 겨를도 없이 웃옷을 찢고 가슴팍에 시퍼런 멍을 남겼다. p239

 

 

첨부]인물 분석과 상징.

 

작품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이다.  인물들중 주목해볼 만한 건 세 명의 여인의 등장인데 바이슈는 아버지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주인공에게 다가와 그의 상처를 치료하려 애쓰며 동시에 자신도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갈망을 보이는 능동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 추쯔 역시 결정적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지만, 그녀도 내부의 상처를 간직한 여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또 한명의 여인. 그녀는 주인공 내가 추쯔를 잊지 못해 찾아가 만나는 계약에 의해 만남을 갖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그녀 역시 사고로 인한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주인공 나, 내가 만나게 되는 주면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는 인물로 상징된다. 회사 사장도 그런 의미에서는 이에 속한다. 특히나 나라는 인물은 가려한 아버지의 자살, 오래전 사고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처럼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의식을 옥죄이게 하는 원죄의식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주인공 나는 바이슈에서 추쯔의 모습을 찾으려하고 그것으로 위로 받고자 했지만,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다시 혼자가 되는 선택을 한다.


벚꽃나무가 사라진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화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내가 더 이상 상처를 안으로 끌어모아 스스로 힘들게 살지 않으려하는 선택을 유도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
류종훈 지음 / 가나출판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

 

역사. 그 책임과 당위성

 

책의 저자 류종훈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피디라고 했다. 그가 중국에 체류하면서 직접 두발로 뛰어다니며 기록한 증거물들이 오롯하게 책으로 나와 세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이 잊혀진 역사의 기록이며 증거라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말처럼 잊혀진 역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알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값지고 좋은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 같다.

 

상고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시간들이 모여 조선의 역사와 해방의 역사. 한국전쟁의 역사. 근현대사까지 한국사는 늘 살아있는 생동감과 더불어 아련함과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500여년이 넘도록 지켜왔던 조선의 역사가 사실은 반목과 반역 그리고 개인의 시기와 각처의 세력들이 만들어놓은 아귀다툼의 시간으로 이어져왔던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역사라는 이름의 흐름이 견디어낸 이 지난한 시간만큼이나, 그 안에서 살다간 이들의 격정과 신산함으로 물들었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때때로 매우 무거운 중압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고개를 들고 주의를 기울이며 바라보는 일조차 숙연함으로 물드는 것을 느낀다.

 

조선 의용군의 이야기도 결코 가볍게 읽어낼 책은 아니다. 책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 청년들의 투쟁과 실질적인 애환(정치적, 사상적, 현실적인)을 담아내고 있다. 그들이 어떤 생각, 즉 어떤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 어떻게 어디에서 모여서 단체를 이루게 되었으며 체계적인 지식교육과 사상교육을 받고, 실전에서 활용가능한 실질적인 군사훈련을 받아 어떤 루트를 통해 이동했으며, 어떤 전투에 참전했던 것인지 상세하게 저술하고 있다. 실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을 순서에 맞게 따라가며 설명한다. 책을 읽는 이들은 저자의 시선을 따라 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젊은이들이 걸어가는 대열 맨 끝에 서서 그들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저자 류종훈은 조선 의용군을 이야기하면서 먼저 필요한 사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 의용군이 생겨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의용군의 시작은 의열단에서 출발한다. 단재 신채호가 주축이 되었고,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라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그리고 저자 류종훈이 주목한 인물 김원봉이 이 책의 중심에 서 있다. 김원봉을 주축으로 각각의 독립을 위한 단체들이 규합하게 되고, 비로소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지지만 중국의 영향(압력?)으로 최종 조선의용군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중국의 변두리 시골 첩첩산중의 오지에서부터 번화가의 대도시를 망라해 이동했다. 낯설고 물선 타지에서 중국 현지인들과의 어려움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가면서도, 일본에 대한 혁명과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던 조선 의용군의 이야기는 중국 전역의 크고 작은 역사의 흔적과 기록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상의 대립은 가혹한 것이다. 조선의용군 그들의 존재가 대한민국에서 사라진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해방이후 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한국전쟁으로 그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왜 그들의 대부분이 북쪽을 선택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전쟁에 대한 미온적인 처세와 당시 함께 전장을 휩쓸던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사이에서 조선의용군은 보다 적극적인 횡보를 선택했고, 그 결과 팔로군을 따라가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이때 조선의용군 안에는 중국공산당원이 함께 하기도 했다는 저자의 기록이 있다.

 

조선의용군의 역사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의 목표 즉,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들이 이념의 차이로 서로 갈라져야 했던 사실. 그 안에 중국 공산당의 이념과 세력이 막강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광을 입고 정치일선에 나온 김일성에 의해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북을 선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고 추방되었던 사실이다. 절절한 희생과 헌신의 역사였지만 그 결과는 얄궂기 한이 없다.

 

북을 선택한 이유로 남에서 외면 받고 사라져야 했던 그들 조선의용군은, 사실 내 나라에 살았던, 내 이웃에 살았던, 그래서 오가며 만났을 법했던 오로지 국운을 걱정했던 어리고 여렸던 또 뜨거웠던 젊은 청춘들이었다. 이제 늦게나마 그들의 진실을 알고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새로운 책임감을 갖게 된다.

다음 세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산 역사를 말해줘야 하는 당위성이 생겼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은 다시금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반짝 유행하고 사라지는 문구가 아니다.

 

책은 조선의용군을 통해 본 독립운동과 더불어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의 배경을 확인시켜주는 연결고리의 성격을 갖는다. 한국사 파트에서 독립운동 부분이 제일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비슷비슷한 단체가 너무 많아 외우기도 힘들다고 하더라. 토막토막 외워할 것이 있고 큰 흐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류종호의 책 조선의용군을 읽어보면 흐름을 이해하는데 일정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선택하는 삶- 같은 상처와 다른 상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지난 여름 아이들과 서점에 갔다가 집어 들었던 책이다. 특별판으로 두꺼운 합지를 덧붙인 양장의 표지에 600페이지 정도의 두께가 두툼한 책이다. 그 때 반양장의 평범한 디자인의 책이 눈에 띄었더라도 어쩌면 나는 이 양장표지의 책을 고집했을 법하다. 약간의 허황된 욕심이 작용했을 게 뻔한 일이니까.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하지만 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아는 게 전무했다. 이번 작품이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처음이었다. 사실은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곤 했다. 내게 난독증이 있었던 것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가 이야기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책의 막바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냈던 것이 바로 명답이었던 것 같다. 구분을 짓지 말고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 그게 정답인 듯하다.

 

책은 모두 3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세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기에 연결성에서 허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을 해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꽤 시차를 두고 발표된 이 세 작품은 구성이나 시점에서도 큰 차이가 있어서 하나의 제목으로 묶는 데에는 무리가 이다. -p6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하나의 주제를 향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전체구성에서의 약간의 허점을 이해하면서 이제 책 속으로 더 자세히 들어가보자. 책은 1부 비밀 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 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1, 2, 3부의 구성은 시간적인 구성으로 보면 될 듯하다. 우리가 굳이 각각의 작품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소설은 어린시절, 청소년기 혹은 청년시절, 그리고 중년이 넘은 노년의 시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인상은 강렬하다.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쌍둥이로 전쟁이 시작되자 할머니에게 맡겨지게 된다. 젊은 어머니는 아이들을 맡기고 떠나버리고 아버지는 종군기자로 먼저 가족에게서 멀어졌다. 처음 아이들과 할머니의 동거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며 생활하게 된다. 1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아이들의 모습과 다르다. 잔인하고 집요하며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 강조된다. 강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정답인지, 아니면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각설하고 소설 속에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행동하면서 성장해간다. 그러나 이들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작용에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배려하려는 이타심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부에서는 홀로 남은 쌍둥이 형제 루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근친상간으로 아이를 낳은 여인 야스민, 그녀가 낳은 아이 마티아스, 전쟁 중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 클라라, 부인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노인 미카엘, 담배와 알콜 중독에 누이를 살해한 서점 주인이었던 빅토르, 동성애를 보이던 페테르까지.

주목할 만한 것은 2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루카스를 비롯해서 하나같이 상처받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물론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물들의 상처에 깊이 관여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인물들의 공통점은 홀로 남겨졌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작용하는 외로움과 상처에서 괴로워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어린 소년 마티아스의 죽음은 유독 큰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또 다른 삶의 선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데, 아이의 죽음을 자살로 그려내는 대목은 무언지 모르는 속상함 그리고 잔인함을 생각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3부 50년간의 고독은 쌍둥이 또다른 형제 클라우스의 등장만으로 혼란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사실 소설을 읽는 동안 가장 머리가 아팠던 부분이 3부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이야기가 어디까지인지.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끝이 나는 것인지 도무지 명확하지가 않아 누구의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고민하지 말고 읽어야 한다는 게 정답이다. 그러면 결론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국경을 넘은 사람은 루카스일까, 클라우스일까.? 같이 국경을 함께 넘다가 죽게 되는 남자는 아버지일까. 아니면 전혀 알지도 못하는 타인이었을까. 사실 쌍둥이 중 한명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독자는 자신의 형제를 외면하는 클라우스와 현실을 인정하고 되돌아서는 클라우스로 살아왔던 루카스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왜 이들은 서로 이렇게 어긋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던 것일까.

 

쌍둥이었던 두 형제의 삶은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모양으로 이어져왔다. 어느 한쪽의 삶이 좋았다고 말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다른 삶 속에서 같은 상처와 또 다른 상처를 각각 가슴에 품고 살았다. 누구의 삶이 더 좋았다고 할 수도 없는 각자의 힘든 삶이었다.

그리고 이들 형제의 고된 삶에서 작가는 한 사람의 삶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다. 어린시절 늘 함께 했으나, 오랜기간동안 떨어져 살아왔으며 끝내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두 사람. 그들은 형제였다. 클라우스로 살아왔던 루카스. 그의 죽음과 어린 소년 마티아스의 죽음이 오버랩되는 순간은 마치 아주 깊고 오래된 까만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책은 작가의 유년시절의 이야기가 담겨진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 속 주인공 루카스는 작가 아코타 크리스토프, 클라우스는 그녀의 오빠를 상징한다고 했다. 늘 함께 했지만 둘 사이에 있었던 불안했던 감정선이 있었으며 이는 소설에서 쌍둥이 형제의 심리에 반영이 되었다는 해설이 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나올법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해가 맞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것과 더불어, 정해진 것이 아닌 상상의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긍정의 효과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렵지만 결론을 내려보자.

인간의 삶에 대한 쓸쓸한 서사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인간은 늘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현실에서도 나와 우리 혹은 우리 모두를 둘러싼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게끔 상황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어찌됐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 안에서 인간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이번 작품이 회자가 되고 있는 까닭은 어쩌면 인간이 선택한 삶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덤덤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낸 점이 돋보였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진다.

 

 

[‘당신 남편은 무죄입니다. 우리는 그를 실수로 죽였습니다. 우리는 실수로 몇몇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제 질서가 회복되었고, 우리는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더 이상 그런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들은 살인을 하고, 복권을 시키고, 사과를 하고 있어. 토마스는 이미 죽었는데! 그들이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들이 백발이 된 내 머리를 다시 까맣게 만들 수 있을까? 미쳐버릴 것 같은 불면의 밤들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p317]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p344-345]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p3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형의 집

 

-선택과 행동

 

희곡집을 읽어본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

135라는 숫자를 적어보려 한다. 이 숫자는 2018년 올해를 기준으로 해서 이 작품이 초연됐던 1879년을 계산해본 결과이다. 백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쩜 이다지도 달라진 게 없는 것일까.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낸 남성의 모습은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하다. 그게 참 묘하게도 모순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습득하는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가.

 

주인공 노라는 남편 헬메르에게 곱게 길러지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극중에 등장하는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소속되어 관리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극 초반에 노라는 이러한 예속된 관계에 부정하거나 불평하는 식의 딴지를 걸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 그대로 수긍하고 남편이 원하는 종달새, 다람쥐가 되어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남편에게 복종하며 순종적인 여인의 삶을 만족하는 듯하다. 그러나 극은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 의해 주인공 특히, 여주인공 노라의 의식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자.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노라는 어떤 계기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조금씩 따져보자. 무슨 일로 그녀가 여행가방을 든 채 문을 열고 남편을 떠나간 것일까.

 

노라는 남편 헬메르가 변호사시절 건강이 악화된 그를 위해 문서를 조작하고 돈을 빌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그녀의 현재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노라 주변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사실 그녀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의 행동에 확실한 불씨를 당기게 되는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남편 헬메르가 아내 노라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며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인간으로서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이러한 남편의 모습이 당대 사회에 만연했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도 그러나 서글프게도 너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실 근원적인 이유를 따지고 보면 노라의 행동과 선택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라는 동정과 측은함이 먼저 꿈틀거리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 좁은 남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답답함이 몰려온다. 그리고 남편으로서 감정조절의 실패한 결과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가정만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 소멸되었을 때 바로 직변하고 있는 헬메스의 노라에 대한 태도는, 분명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무조건적으로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그의 행동은 매우 어리석었다, 라고밖에는 달리 표현이 어려워 보인다.

동기야 어찌되었든간에 결과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한순간에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힌다. 남편은 부인인 노라가 사려깊지 못하고 무분별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기에, 더 이상 아내로서 더욱이 어머니로서는 더더욱 자격이 없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녀는 남편이 쏟아부어내는 비난과 매정하기 짝이 없는 분노를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끝내 그녀 노라는 자아를 찾아 떠나게 된다. 그동안에 새장에 갇혀 노래를 불러왔던 자신의 인위적인 삶에서, 스스로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방을 들고 남편의 곁을 떠난다.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작품 82년생, 김지영을 지난달 책모임에서 같이 읽었을 때 우리는 이 작품의 한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작품은 무언가 긍정적이면서도 중요한 메타포를 잊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어린아이가 늘어놓는 투정과도 같은 느낌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페미니즘과 이를 표현하는 문학은 투정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때문에 위의 작품은 호불호가 갈리고 남자들에게는 비판의 시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은 달랐다. 푸념과 비난, 좌절이 아닌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여주인공의 과감한 결정과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라는 논란을 차치하고서라도 궁색하게 날개를 활짝 펼쳐내지 못한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어느 소수의 페미니즘의 문학과는 큰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분명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때마다 그 순간마다 모든 여성들이 노라와 같은 선택을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아를 찾고 자신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작가 입센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힘을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의 핵심은 투쟁이 아닌 진정한 평등과 동등함에서 유지되는 공존이다.

 

노라....

-토르발, 나는 당신에게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먹고살았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거죠. 당신과 아버지는 내게 큰 잘못을 했어요. 당신들은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이 있어요.

 

헬메르...

노라, 말도 안 돼. 당신은 감사할 줄도 모르는군. 당신은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나?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p116

 

노라...

그 말은 더 이상 믿지 않아요.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p118

 

누구나 현실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현실이 자신에게 거대한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면 더욱 힘들어지는 게 모든 인간이 지니는 당연한 심리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페미니즘 문학으로만 들어다볼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변화하면서 갖는 내적성장이라는 측면으로 들여다보아도 괜찮을 듯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겨울 방학이 되기 전까지 이번년도의 마지막으로 작품으로 책모임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 실격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p61
     
여자들의 입술에서 쓸쓸해,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이 말은 어쩌면 주인공 요조 자신이 스스로에게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동네에 술주정뱅이가 살았다. 아니 지금도 살고 있다. 그는 오십대를 중반을 넘은 나이였지만 예순 중반을 훨씬 더 넘겨보였다. 비가 오늘 날이면 한손에 소주병을 들고 달랑달랑 흔들어대며 그 역시 갈지자로 흔들리며 아파트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다. 대낮에도 술에 취한채 아무에게나 시비를 붙이고,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 그에게 교회에 갈 것을 권했고, 이건 무슨 하나님의 정해진 뜻처럼 삐딱하기 그지없던 그가 순수하게 누군가를 따라 교회에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제 다시 본 그의 모습은 말쑥하고 말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아무도 그의 생에 대해 비난할 자격은 없어보이더란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 사람이 간직한 억겁의 상처들을....
     
소설 인간 실격 읽고 난 느낌은 쓸쓸함과 씁쓸함이다. 주인공 요조가 종종 신에게 질문하듯 나 역시 질문을 해본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인간실격이라 하는 것은 죄가 맞지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소설 이상이 생각이 나더라. 벌레를 이야기하던 카프카도 생각나더라. 그냥 연상 작용에 한 가지일 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찌질하게도 징징거리면서 고민하고 그렇게 자신의 버거운 삶에 돌멩이 하나라도 집어 냅다 던지고 싶어하는 이 가려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또 한명의 시인 동주를 떠올렸다.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비슷하다. 얼마나 예민하게 문제를 인식하는가, 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고민하는가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술이란 아이러니한 장르이다.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밥벌이라도 할정도라면 어느정도 세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문학작품에서 그려지는 몇몇의 예술가들은 현실과 이상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개인적인 사견은 이렇다. 이런 비정형화되고 비이성적인 (딴은 어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예술적 행위라고 단정짓기도 하지만)예술의 단면을 보이는 것이, 뭇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들은 정해진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물론 예술가들의 기인한 행동들에 다 면죄부를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선입관에서 한 꺼풀 정도는 벗겨낸 새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용기는 내어볼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이성만 주장하는 오래된 내 주치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
     
요조라는 인물은 자기방어에 확실한 인물로 설정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웃기며 익살스런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순간 타인이 느끼는 흥미와 재미, 가벼운 익살에 요조는 진정으로 동요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 순간마저 안으로 숨어들어가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장벽을 콘크리트 벽처럼 쌓아올리는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반항심은 겉으로 과격하게 표출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안으로 파고들어 자기 안에 있는 자아의 인격을 가둬버리는 두 가지 타입이 있는지도 모른다. 전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소주병 아저씨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조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두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과거에 만들어졌던 상처의 구체화이다. 어쩌면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습관일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고뇌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배회하는 의식의 단면도 이에 속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상처를 포함한 마음의 상처, 인간관계의 상처와 일상의 회의감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안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들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자기 학대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학대일 수도 있는데, 그 방향성이 안으로 향하든, 밖으로 향하든지간에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아를 향한 반항심과 자기애가 짙게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크게 뜬 눈에는 경악의 빛도 없었고 거의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리운 듯한 빛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p124-
     
내가 소주병 아저씨에게 느꼈던 감흥을 소설 속 등장하는 요조 주변의 여자들 역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참 묘하게도 요조라는 인물 주변에는 늘 여자가 등장한다. 물론 제대로 교육받은 여자들이라기 보다는 유곽, 가게, 매춘, 약국주인 등등... 그녀들 역시 삶의 고단함에 지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 중에 어느 여인은 요조와 자살을 시도하다 죽기도 한다. 또 그 중에 어느 여인은 그녀의 평범한 행복을 보여주었기에 요조로 하여금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까, 짙은 두려움으로 다시금 암울한 세상으로 떠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행복초자 요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궁색하고 피폐한 인생, 망가진 육체, 정신병동.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스스로에게 요조는 ‘인간실격’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처럼, 주인공 요조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신의 의지대로 만들어지며 끌려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조적인 위로의 말은 소설의 말미에 실려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p1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