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적의 벚꽃

-서정의 무게감-

 

 

대만 작가 왕딩궈의 작품이다. 사실 중화권 소설에는 익숙하지 않아 그만큼 새롭고 또 그만큼 설렜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게 있어 2000년 이후에 출간된 소설은 말 그대로 ‘낯설게 하기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깊이 들여다본 소설 작품도 많지 않을뿐더러, 최근 젊은 작가들의 성향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작가들과 작품들은 90년대 안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라고 은유적으로 말해야 할 듯하다. 왕딩궈의 작품에 끌렸던 까닭은, 절필 끝에 오랜만에 소설을 들고 돌아왔다는 작가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딩궈의 ‘적의 벚꽃’을 읽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속도가 잘 붙지 않았다. 왜였을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무언가의 무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우스워지려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이 갖는 보이지 않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보던 때가 아마도 20대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에 말미에는 이례적으로 4편의 추천사를 비롯한 해설이 실렸다. 모두 중국학자, 평론가, 시인의 글이다. 어쩌면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자세한 소개를 위한 목적도 일정부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책을 소개할 때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해와 보다 객관적인 해설이 들어가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나는 이례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그다지 많은 분량의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설이 참 많이도 실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저자 왕딩궈와 그의 작품을 생각하는 대만인들의 관심과 사랑이 높은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과 사건 속에서 상처받고 넘어지고 다시 극복하기를 원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삶의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때로는 힘든 인간관계와 부조리한 사회를 대표하는 얄궂은 현실 앞에서, 삶의 본질을 알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절망적인 결말로 혹은 어떤 뚜렷한 결말이 아닌 열린 결말을 독자에게 선물처럼 건네는 작가의 의도도 여럿 보아왔다.

 

‘적의 벚꽃’ 역시 상처 받은 사내가 등장한다. 돈과 권력 앞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주인공 나에게 여자가 찾아온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라는 이름의 순간이 덮쳐온다. 이 불행은 이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남자는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기 위해 외딴 바닷가에 카페를 연다. 인적이 드문 곳에 카페를 연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소설의 시선은 이 카페를 찾았던 노인의 존재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걸 복수와 복수라는 단순한 어휘로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개인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의 크기는 같지 않으니 말이다. 치사하거나 속 좁은 복수, 거창한 복수, 위험한 복수 등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그런데 말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다른 방법을 원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정말 말 그대로 복수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함으로 또다른 차원의 착한 복수?를 선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나, 즉 주인공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직접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가해자로 지목된 노인이 스스로 자멸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가해자의 파멸과 피해자의 회한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주인공을 위한 작가의 위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플롯에 의존하기보다는 내면의 심리에 더 집중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유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복선과 암시 역시 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왕딩궈의 ‘적의 벚꽃’에서 시적인 분위기를 내는 은유와 상징의 맛이 담긴 표현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 어떤 존재로 관계하고 있을까...

 

책 ‘적의 벚꽃’은 묵직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인생의 씁쓸함을 아는 사람만이 커피의 묵직한 향기를 폐부로 받아들여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독한 영혼을 깨워낸 뒤, 터져 나오려는 신비로운 탄식을 욱여 삼켜 비루한 식도와 목구멍 사이에서 수줍게 맴돌게 할 수 있었다. p31

 

-아뇨, 선생님의 영혼을 불러낼 방법을 찾을 거예요. p64

 

-괜찮아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기다릴게요. p69

 

-그때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놓았더라면, 슬픔이 가져다주는 신비한 힘을 그녀가 적당히 감당할 수 있게 했더라면, 어쩌면 좌절이 찾아왔을 때 그녀가 그렇게 급히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p80

 

-푸른 잎사귀 안에 감추어져 있던 마른 가지가 공중에서 부러지면서 부러진 가지 끝이 화살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꽃도 잎사귀도 달려 있지 않은 마른 가지가 흐릿한 환영처럼 날아와 피할 겨를도 없이 웃옷을 찢고 가슴팍에 시퍼런 멍을 남겼다. p239

 

 

첨부]인물 분석과 상징.

 

작품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이다.  인물들중 주목해볼 만한 건 세 명의 여인의 등장인데 바이슈는 아버지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주인공에게 다가와 그의 상처를 치료하려 애쓰며 동시에 자신도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갈망을 보이는 능동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 추쯔 역시 결정적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지만, 그녀도 내부의 상처를 간직한 여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또 한명의 여인. 그녀는 주인공 내가 추쯔를 잊지 못해 찾아가 만나는 계약에 의해 만남을 갖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그녀 역시 사고로 인한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주인공 나, 내가 만나게 되는 주면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는 인물로 상징된다. 회사 사장도 그런 의미에서는 이에 속한다. 특히나 나라는 인물은 가려한 아버지의 자살, 오래전 사고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처럼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의식을 옥죄이게 하는 원죄의식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주인공 나는 바이슈에서 추쯔의 모습을 찾으려하고 그것으로 위로 받고자 했지만,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다시 혼자가 되는 선택을 한다.


벚꽃나무가 사라진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화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내가 더 이상 상처를 안으로 끌어모아 스스로 힘들게 살지 않으려하는 선택을 유도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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