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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인간 실격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p61
여자들의 입술에서 쓸쓸해,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이 말은 어쩌면 주인공 요조 자신이 스스로에게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동네에 술주정뱅이가 살았다. 아니 지금도 살고 있다. 그는 오십대를 중반을 넘은 나이였지만 예순 중반을 훨씬 더 넘겨보였다. 비가 오늘 날이면 한손에 소주병을 들고 달랑달랑 흔들어대며 그 역시 갈지자로 흔들리며 아파트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다. 대낮에도 술에 취한채 아무에게나 시비를 붙이고,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 그에게 교회에 갈 것을 권했고, 이건 무슨 하나님의 정해진 뜻처럼 삐딱하기 그지없던 그가 순수하게 누군가를 따라 교회에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제 다시 본 그의 모습은 말쑥하고 말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아무도 그의 생에 대해 비난할 자격은 없어보이더란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 사람이 간직한 억겁의 상처들을....
소설 인간 실격 읽고 난 느낌은 쓸쓸함과 씁쓸함이다. 주인공 요조가 종종 신에게 질문하듯 나 역시 질문을 해본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인간실격이라 하는 것은 죄가 맞지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소설 이상이 생각이 나더라. 벌레를 이야기하던 카프카도 생각나더라. 그냥 연상 작용에 한 가지일 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찌질하게도 징징거리면서 고민하고 그렇게 자신의 버거운 삶에 돌멩이 하나라도 집어 냅다 던지고 싶어하는 이 가려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또 한명의 시인 동주를 떠올렸다.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비슷하다. 얼마나 예민하게 문제를 인식하는가, 또 얼마나 깊이 들어가 고민하는가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술이란 아이러니한 장르이다.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밥벌이라도 할정도라면 어느정도 세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문학작품에서 그려지는 몇몇의 예술가들은 현실과 이상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개인적인 사견은 이렇다. 이런 비정형화되고 비이성적인 (딴은 어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예술적 행위라고 단정짓기도 하지만)예술의 단면을 보이는 것이, 뭇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들은 정해진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물론 예술가들의 기인한 행동들에 다 면죄부를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선입관에서 한 꺼풀 정도는 벗겨낸 새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용기는 내어볼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이성만 주장하는 오래된 내 주치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
요조라는 인물은 자기방어에 확실한 인물로 설정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웃기며 익살스런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순간 타인이 느끼는 흥미와 재미, 가벼운 익살에 요조는 진정으로 동요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 순간마저 안으로 숨어들어가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장벽을 콘크리트 벽처럼 쌓아올리는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반항심은 겉으로 과격하게 표출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안으로 파고들어 자기 안에 있는 자아의 인격을 가둬버리는 두 가지 타입이 있는지도 모른다. 전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소주병 아저씨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조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두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과거에 만들어졌던 상처의 구체화이다. 어쩌면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습관일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고뇌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배회하는 의식의 단면도 이에 속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상처를 포함한 마음의 상처, 인간관계의 상처와 일상의 회의감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안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들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자기 학대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학대일 수도 있는데, 그 방향성이 안으로 향하든, 밖으로 향하든지간에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아를 향한 반항심과 자기애가 짙게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크게 뜬 눈에는 경악의 빛도 없었고 거의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리운 듯한 빛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p124-
내가 소주병 아저씨에게 느꼈던 감흥을 소설 속 등장하는 요조 주변의 여자들 역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참 묘하게도 요조라는 인물 주변에는 늘 여자가 등장한다. 물론 제대로 교육받은 여자들이라기 보다는 유곽, 가게, 매춘, 약국주인 등등... 그녀들 역시 삶의 고단함에 지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 중에 어느 여인은 요조와 자살을 시도하다 죽기도 한다. 또 그 중에 어느 여인은 그녀의 평범한 행복을 보여주었기에 요조로 하여금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까, 짙은 두려움으로 다시금 암울한 세상으로 떠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행복초자 요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궁색하고 피폐한 인생, 망가진 육체, 정신병동.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스스로에게 요조는 ‘인간실격’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처럼, 주인공 요조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신의 의지대로 만들어지며 끌려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조적인 위로의 말은 소설의 말미에 실려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