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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라트 산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평점 :
아라라트 산
23년 수능이 있는 날이다. 하늘이 많이 흐리다. 아주 오래전에는 입시 한파라는 게 있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변해가는 세월만큼이나 날씨도 참 변화무쌍하지라, 날씨마저 한쪽으로 간략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어보인다. 흐린 날이 지나고나면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어쨌든 긴장해서 떨리는 마음들이, 한파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져 좋은 결과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은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날인가. 자식이무언지.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명명되어지는 삶이란. 참 오묘하고, 참 어렵고, 또 참으로 거스를 수 없는, 그렇게 먼저 신이 예비해둔 길 같기도 하다.
72페이지의 시집을 읽어내기가 버겁다. 이토록 얇은 시집이 또 있을까. 겉으로 다가오는 시집의 분위기는 얇고 가벼우며 아담하다. 그러나 실은 거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루이즈 글릭의 시집 중 두 번째로 읽어본 작품은 ‘아라라트 산’이다. 아라라트 산은 어디에 있는 산일까. 역자 정은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아라라트 산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신의 노여움으로 생긴 홍수로 표류하다 가닿은 산이라고 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가 아는 노아 할아버지는, 산에 가닿기 전에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보냈지 아마. 아니. 순서가 틀렸다. 까마귀를 먼저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 대신 비둘기를 보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는 배신의 이미지, 그리고 푸른 잎을 입에 물고 돌아온 비둘기는 사랑과 보은의 이미지로 굳어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까마귀는 나름의 생존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을 했을 뿐, 그것만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비둘기는 왜 인간에게 다시 돌아갔을까. 애초에 신이 비둘기에게 다시 돌아가라 가르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라라트 산’ 이라는 글릭의 시는 단순히 시집만을 읽었을 때와 역자의 해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우스갯소리이겠지만, 시집은 해설집과 나란히 옆에 두고 읽어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난해함을 가시처럼 품고 있는 시집이다.
역자의 해설에서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자면, ‘아라라트 산’이 출간된 시점은 1990년이었고, 지난주에 먼저 읽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이 출간된 시점은 1980년이었다. 물론 십년이라는 텀 그 사이에도 시인의 작품집은 계속 출간되었다는 것. 그리고 90년 이후 21년까지 그녀의 작품 활동은 현재행인 듯했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사유는 계속 달려가는 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먼저 접했던 시집 ‘내려오는 모습’ 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 ‘아라라트 산’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생이라는 ‘중간’지점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 육체를 떠나가는 영혼들을 끌어안는 어느어느 시선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느낀 변화라면 그 시선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려오는 모습’에서 깊은 우물과 같은 곳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내적 자아의 모습이 자주 언급되었다고 한다면, ‘아라라트 산’ 에서는 전작보다는 더 넓은 시선을 보여준다고 느끼게 된다. 시인과 아버지. 시인과 어머니. 시인과 여동생. 그리고 시인의 아들과 시인의 조카. 마지막으로 어려서 죽은 언니까지.
시집은 어쩌면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라 했던, 역자 정은귀의 해설에 공감하게 된다.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시인은,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모습을, 그 아버지를, 아버지를 덤덤하게 떠나보내는 반쪽뿐인 어머니를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랑하게 되는가 싶다. 여기서 반쪽분인 어머니의 이미지는 죽은 언니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 그로 인해 어머니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시인의 유년시절 자아와 그 맥락이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
‘뭔가가 바뀌었다:언니가 죽자,
엄마 심장은
아주 차갑고, 아주 딱딱해졌다.
자그마한 철 목걸이처럼.
내 언니의 몸은 자석이라고
그런 것만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엄마 심장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자라도록 말이다.
』
--------------------------- 아라라트 산 ‘잃어버린 사랑’ 일부 p23
『
내가 잘하는 게 하나 있었으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착해지려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죽은 아이한테서 엄마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그렇게 했다.
난 마음껏 아이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그렇다,
멈추었다 갈 수는 있지만 방향은 바꾸지 못하는 장난감 같다.
』
----------------------------아라라트 산 ‘이모’ 일부 p29
조금. 조금만 이야기의 흐름을 넓게 뛰어보자. 너무 한 곳에 몰입해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이다. 환기가 필요한 시점인가. 한편 시인은 매우 혼란스럽고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듯 긴장감을 보이지만, 결국 그녀는 혼란의 강을 스스로 잘 건너가 종단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반듯하게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기어이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시집 ‘아라라트 산’에서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곳은, 혼란과 암울 혹은 역경이 아닌 그 난관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느 하나의 긍정적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좀 희망적인가. 그러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그녀의 시집을 단 두 권밖에 보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단 두 권의 시집으로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역자 정은귀는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 ‘최초의 기억’을 언급하며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수동적인 사랑이 아닌 능동적인 사랑으로 이해 해석하면 좋을법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
한편, 개인적으로 감히 역자의 이야기에 보태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여겨 본 텍스트는 ‘최초의 기억’ 바로 앞전에 실린 작품 ‘천상의 음악’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화자. 이 화자의 이야기 안에 담긴 고백 같은 바람들. 어쩌면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진솔한 면면들이지 않을까.....
『
현실에서, 우리는 길가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본다;
이따금씩, 새소리가 정적을 뚫는다.
바로 이 순간, 우리 둘 다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죽음에도, 고독에도 편안하다는 사실을,
내 친구는 땅에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애벌레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친구는 늘 온전한 무언가, 아름다운 무언가, 자기를 빼고도 삶이 가능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쓴다.
우린 아주 조용하다. 여기 말없이 앉아 있으면 평화롭다, 구도는 변함없고, 길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대기는 서늘해지고, 여기저기서 바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건 바로 이 고요함이다.
형식을 사랑하는 건 끝을 사랑하는 것이다.
』
-------------------------------아라라트 산 ‘ 천상의 음악’ 일부 p69
인간이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혼돈의 경계를 뚫고 결국 나아가고자 하는 곳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이데아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것까지 신이 준비해둔 무엇이라고 생각을 돌려보면 그나마 이내 마음이 편해지려나. 어쩌면 노아가 떠나보냈던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도, 까마귀를 믿지 못해 대신 날렸던 비둘기가 돌아온 것도 신의 뜻이요.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개체마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자위의 측면이 강해지는 가 싶다. 중구난방식 말도 안 되는 자위와 자조라고 해야하나.
마지막이다.
죽음에도, 고독에서도 편안할 수 있다는 시인의 말.
모든 것이 고요해질 수 있다는 시인의 마지막 말이 긴 울림으로 자리하는가 싶다.